서문성 교무의 '소태산대종사 생애 60가지 이야기'

▲ 원기38년 6월1일, 소태산대종사성비 제막식.
▲ 원기34년 4월25일에 건립된 소태산대종사 성탑.
원기28년 6월1일, 소태산대종사가 열반에 든 후 일제의 간섭으로 장례식도 성대히 치르지 못하고 장례 후 종재까지 성해(聖骸)를 조실에 임시로 안치했다. 일제는 성해를 총부에도 모시지 못하게 했다.

원기28년 7월19일, 총부 대각전에서 49재식을 마치고 임시로 익산군 북일면 신흥리 장자산 공동묘지에 안장하고 '소태산일원종사지묘(少太山一圓宗師之墓)'라는 묘비를 세웠다.

열반한 소태산대종사를 마음만이라도 가깝게 느끼고 추모하고 싶어 묘지를 찾는 제자들을 일경이 발길을 돌리도록 했고, 후일에는 금족령(禁足令)을 내리기까지 했다.

소태산대종사가 열반한 2년 후, 1945년 8월에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을 맞이하자 소태산대종사의 성해를 공동묘지에 쓸쓸히 그대로 모셔두어서는 안 된다는 정산종법사와 대중들의 의견이 대두됐다.

소태산대종사의 성탑 기지를 총부 경내에 정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어느 명당복지(明堂福地)를 찾아 터를 정하느냐하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본래부터 구비된 복지를 찾느니 보다 차라리 복혜양족한 성탑을 봉안함으로써 박지황토(薄地荒土)도 명당으로 변하는 것이 거룩한 일이라 하여 현 총부 구내 송림에 성탑을 조성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소태산대종사의 위업과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열반 6년 뒤인 원기34년 4월10일, 정산종법사 등 남녀 임원급 기타 일반 대중이 장자산 소태산대종사의 묘지에서 성해이안식을 간단히 거행한 후 주위 석물을 해체하여 성해상(聖骸箱)을 내어 모시고 자동차로 돌아와 조실 응접실에 임시 안치했다.

4월25일, 대각전에서 성해이안식을 다시 거행하고, 성탑봉안지인 송대로 가서 성해입탑식을 엄숙한 가운데 진행하고 각 지방 대표들의 분향재배로 의식을 마쳤다.

성탑은 각지 교도들의 성금을 모아 황등산 화강석으로 연화를 양각한 기단위에 연화 대석을 받치고 원석(圓石)을 올려 그 안에 성해를 봉안한 후 5층 탑신과 개석을 쌓고 '대종사성탑(大宗師聖塔)'이라고 각명하여 그해 10월에 준공했다. 이로써 소태산대종사가 열반한지 6년 만에 성해를 성탑에 모셨다.

원기34년 4월25일, 소태산대종사의 성탑에 성해입탑식을 거행하고 이튼 날 중앙교의회에서 '대종사주성업봉찬회'가 조직되었고, 이듬해 중앙교의회에서 '교단창립 제1대 기념사업 준비위원회'가 구성됐다.

총부를 비롯한 각지의 교도들의 정성을 모아 성업봉찬 사업의 하나로 소태산대종사의 생애와 업적을 길이 추모하기 위하여 원기37년 11월 소태산대종사의 성탑 동남 편에 '대종사성비(大宗師聖碑)'를 기공했다.

비문은 류허일과 이군일이 써 보았으나 소태산대종사의 주세불 선언과 원불교의 주세회상 선언이 미급하여 정산종법사가 다시 짓기로 했다.

정산종법사는 〈대종경〉 편수와 제1대 결산 성적사정 등으로 격무 중에도 밤 시간과 새벽 시간을 이용하여 '원각성존 소태산대종사 비명병서(圓覺聖尊少太山大宗師碑銘竝序)'를 완성했다.

정산종법사가 지은 비문을 강암 송성용이 공회당 작은방(성적당)에서 글씨를 썼다. 비에 비문의 지은이와 글씨 쓴 이를 새기기로 했으나 송성용이 "이러한 성스러운 비에 감히 이름을 새길 수 있겠습니까?"라고 사양하여 이름은 새기지 않기로 했다.

보령에서 가져온 빗돌이 도착하여 정산종법사가 짓고 송성용이 쓴 '원각성존 소태산대종사 비명병서'를 오석 사면에 음각으로 각자(刻字)를 마치고 원기38년 5월20일에 비를 세웠다.

원기38년 4월26일 제1대 성업봉찬대회 시에 완공하기로 하였으나 석공의 사정으로 늦어졌다. 그리하여 6월1일 하향예일(夏享禮日)에 정산종법사와 수백 대중이 제막식을 했다.

※다음호 부터는 오광익 교무가 '반야심경'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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