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 위대함 해외에서 더 알아 줘"

50년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국악방송에 매료된 소녀가 있었다. 그는 당시 국악방송을 진행하던 박초월 선생에게 편지를 썼다. "나도 국악을 하고 싶다. 제자로 받아 달라." 그는 박초월 선생으로부터 답장을 받았다. "한 번 서울로 올라와 봐라. 너의 재능을 보자."

녹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국악인 나경자(65·법명 지향) 교도의 이야기이다. 50년 전을 회상하는 그의 눈빛은 수많은 추억이 반짝였다.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올라간 그는 박초월 선생을 만났다. 박 선생은 어린 그를 보고 "소리 한 대목 해 봐라"고 주문했다. 그는 서슴지 않고 아침마다 동네 확성기를 통해 나왔던 '서천 달밝은~' 한 대목을 시원스레 불렀다. "목소리가 좋다. 잘 다듬으면 되겠다." 그렇게 그는 당시 국창이었던 박초월 선생의 문하생이 된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서울 관훈동에 국악예술학교(당시 교장 박헌봉)를 박귀희·박초월·김소희 선생이 힘을 모아 학교를 설립했다"며 "당시에는 중학교 뿐이었다. 오전에는 학과수업하고 오후에는 실기 공부를 주로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무용은 이매방 선생님에게 배웠고 소리는 박초월 선생에게 배웠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됐다. 훌륭한 선생님에게 배워서 얼마나 복이 많았는지 감개가 무량하다"고 눈시울을 적셨다.

1962년 그는 최초로 일본에 가서 국악공연을 하기도 했다. 전국 공개오디션을 통해 공연단에 뽑힌 것이다. 1965년에는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다. 그 인연으로 일본을 더 자주 나가게 됐다. 그러다가 아예 일본에 정착을 하고 활동했다. 이후 호주로 이민을 가게 됐다.

그는 "원불교는 호주에서 알게 됐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항산 김인철 종사님이 법명도 내려주시고 문화에 대한 애정을 많이 주셨다"며 "호주에는 세계다민족축제가 있다. 그런데 한국은 아무런 공연도 하지 않았다. 너무나 안타까워 한국 대사관을 찾아가 '유학생이 얼마나 많은데 가만히 있느냐, 내가 사물놀이와 한국무용을 가르쳐 축제에 참여하겠다'고 설득을 했다. 그렇게 교민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원불교와도 인연이 됐다"고 소개했다. 그는 해외에서 한국문화에 대한 열정을 그렇게 펼쳐 나갔다.

그는 "1년간 한 학교의 차고를 빌려 사물놀이를 연습했다. 이후 축제 때에는 사물놀이가 맨 앞에 서서 축제 분위기를 이끌었다"며 "이 일로 인해 유학생들간 결속력과 유대강화가 됐다. 지금까지도 한국전쟁참전 호주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해외에서 알아주는 우리 국악과 무용을 국내에서는 등한시 하는 것이 아쉽다. 지상파 방송에서도 근본 있는 문화육성 정책을 펼쳐야 한다. 또 초등학교에서부터 장구와 판소리의 기본을 가르치는 교육이 아쉽다"고 쓴소리도 서슴치 않았다.

고향인 고흥에서 '나경자국악연구원'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한국에는 2002년에 스승님 추모제 때문에 들어왔다가 지인들의 권유로 눌러 앉게 됐다"며 "고흥은 소리의 고장이면서도 정작 문화에 대한 대화가 안 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새싹들을 찾아 보람차게 길러 내고 싶다"는 열망을 밝혔다.

그는 1년 후인 2003년 국무총리상에 이어 2006년 보성소리축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그는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하지만 목표가 있어야 도전을 하며 발전을 한다. 이제 마지막 남은 숙제는 인간문화재가 되는 것이다"며 "문화방면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힘껏 해 보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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