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한국인의 글로벌 DNA

▲ 이희수 교수.

한국사회가 바야흐로 다문화사회에 진입함에 따라 국제결혼은 별로 신기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1500년 전에 이미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공주가 결혼했다고 하면 잘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대서사시 〈쿠시나메〉가 이란에서 발굴돼 주목을 받고 있다.

6월28일 장성군은 장성문화예술회관에서 이희수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를 초청해 '고대 한국인의 글로벌 DNA(페르시아 왕자와 신라공주의 사랑)'를 주제로 21세기 장성아카데미를 열었다. 이슬람 문화의 전문가인 이 교수는 다년간 연구를 통해 우리 사회에 편만해 있는 이슬람 문화에 대한 무지와 편견, 오해를 바로 잡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 교수는 "우리 민족은 적어도 4~5세기부터 온 몸과 마음을 열고 글로벌을 받아들이는 글로벌DNA가 형성돼 있었다. 이것이 오늘날 작은 나라가 역동적인 노력과 힘으로 세계 최고의 위치에 올라갈 수 있는 저력이 됐다"며 그 근거를 우리와 중동의 오랜 역사적 교류에서 찾았다. 이 교수는 특강에서 중동과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유물을 통해 "문화는 잡종이 발전하며 문화는 선악,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의 문제다"며 "거대한 세계사의 흐름과 역동 속에서 우리 문화를 찾고 세계사에서의 좌표를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동시 패션 시대

우리 문화는 삼국시대부터 지구촌에 완전히 열려 있었다. 그 당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물과 과학과 기술을 육지와 해상의 실크로드를 통해서 받아 드렸다. 우리 문화가 우수하고 탄탄한 것은 바로 우리문화 기층에 외부문화가 상당히 많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문화는 원래 잡종이 우수하다. 자기와 다른 생각 다른 가치를 받아들여서 한국문화라는 용광로 속에 녹여서 얼마만큼 그 문화를 자기화 하는가하는 것이 문화민족의 저력이다. 자기화 하지 못하면 남의 문화를 모방하거나 예속돼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문화는 원래 용광로가 단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녹여서 우리 문화화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 이것이 오늘 한국문화의 세계화 DNA라고 생각한다.

1500년전에 중동과 한반도가 직선거리가 1만㎞나 떨어져 있었는데 어떻게 교류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아랍-페르시아 상인들의 신라 진출이 본격화 된 8~9세기경에 세계도시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슬람 제국의 수도 바그다드-당나라의 수도 장안-신라의 수도 경주가 있었다. 이 사이에 문화전파속도는 8개 월정도 됐다. 콘스탄티노풀 상류계층에서 유행했던 패션, 트래드, 장신구, 디자인, 색감 등은 8개월 정도 지나면 우리 사회의 상층부에서 유행됐던 것이다. 즉 문화적으로 '동시 패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이미 그때 콘스탄티노풀과 신라 사이에는 소위 문화고속도로라고 하는 실크로드가 뚫려 있었다. 빈번한 물자와 사람들이 오고 갔고 그 사람들이 이동하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과학과 기술, 사상과 신앙, 종교와 아이디어가 함께 왔다. 실제로 통일신라시대 고분에서는 경주 황남동 상감유리구슬(보물 제634호), 황금 보검(보물 제635호) 등 서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이란에서 〈쿠쉬나메〉 발굴

7세기 이전에는 육로가 선호됐지만 7세기 이후 8세기부터는 해로가 더 성업했다. 7세기 말쯤부터 중국의 양주 이남의 남방 연해주에는 아랍-페르시아 상인들이 자치공동체인 번방을 형성해 활동했다. 양주 이북인 북방 연해주에는 장보고 세력의 신라방이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중간지점인 양주에는 양대 상권이 모두 존재해 신라 상인과 페르시아 상신들이 직접 대규적인 교역이 이뤄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유물이 많이 나오고 인류학적으로 고고학적으로 연구를 해서 심증은 있었지만 기록은 찾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찾았다. 그것이 바로 이미 페르시아 사람들이 직접 신라에 왔다는 기록이 담긴 서사시 〈쿠쉬나메(Kush-nameh·쿠쉬 이야기)〉발굴이다.

작년에 이란 국립박물관으로부터 '쿠시나메' 자료를 입수해 번역 해제 중에 있다. 쿠시나메의 시대 배경은 5~7세기이다. 민간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야기를 11세기에 이란의 한 학자가 평생 필사해서 책으로 옮긴 것이다. 내용을 보면 650년경에 사산족 페르시아 제국이 아랍에 멸망하면서 페르시아 왕자를 당나라로 정치적 망명을 시킨다. 그러나 당나라에서도 정치적 상황이 좋지 않아 다시 신라로 오게 된다. 페르시아 왕자는 신라에 와서 신라 공주와 결혼해 자식을 낳고 50년쯤 살다가 다시 해로로 바그다드로 돌아가는 거대한 서사시이다. 그런데 이 책의 840쪽 중에서 520쪽이 신라에 관한 내용이다. 이게 완벽하게 해제가 되고 번역이 되면 우리 고대사를 다시 쓸 정도로 방대한 내용을 담았다.

1427년 세종 칙령

페르시아 왕자가 신라에 올 때는 7세기 초엽이였는데 그 뒤 200년쯤 지나 장보고가 등장할 때 우리 나라와 아랍-페르시아 상인들과의 교역은 우리가 감당 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9세기 중엽에는 아랍-페르시아 상인들이 해로로 흑산도까지는 안방 드나들 듯이 빈번하게 오갔다. 이슬람들의 교역은 고려시기까지 지속돼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고려에 왔고 공동체를 이루면서 조선 초기까지 집단촌을 이루면서 살았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하는 것이 의문이었다. 그 당시 중국 연해주에서 상권을 형성하여 살던 아랍-페르시아인들이 중국에서 당나라 말기에 일어난 '황소의 난'을 피해 중국 내륙과 동남아 등지에 흩어져 살았다.

지금도 그 후예들이 중국에서는 회족으로 동남아에서는 이슬람문화권을 형성해 살고 있지만 유독 한반도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의문이었다. 그런데 그 의문을 조선왕조실록에서 풀었다. 조선왕조실록에 1427년에 예조판서가 세종에게 상서를 올린 기록이 나온다. 상서의 내용에는 "회회(이슬람)의 무리들이 이미 아국백성이 되었음에도 자기들의 습속과 언어와 풍속을 유지함으로 아국여성과 통혼하기 매우 어렵다. 이미 아국 백성이 되었으니 오랑캐의 습속을 폐지하여 통혼하게 하고 우리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 가한 줄 아뢰오"라고 상속을 올리니 세종이 "그리하라"는 한마디가 나온다. 이것이 1427년의 세종 칙령이다.

그래서 1427년부터는 이제 이슬람을 지칭하는 '회회'의 단어는 우리의 역사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인해 4~ 5세기에 출발해 조선초기까지 이어왔던 이슬람과의 교류가 단절되는 계기가 됐다. 조선중기부터는 유교의 주자학이 최고의 가치고 나머지는 오랑캐로 가지를 치면서 그것이 결국 쇄국정책으로 갔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던 무한한 글로벌 DNA가 유교정책에 의해 글로벌과 차단되면서 결국 세계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일제의 지배를 받게 되는 역사적 왜곡과도 전혀 무관하지 않다.

이슬람은 문화 파트너

해방된 이후에 다시 우리 민족이 천수백년동안 축적되어왔던 거대한 글로벌의 DNA의 역동성이 다시 발현하고 있다. 현재 외국인들이 새로운 다문화사회 일원으로 우리 사회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다. 다문화사회로 가면서 우리가 명시해야 될 것이 있다. 그 사람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우리 주류사회를 위협하는 것은 막아야겠지만 우리가 다른 가치 다른 문화를 받아드려 우리 문화 속에 녹여서 우리 사회에 기여하게 하는 것이 앞으로 우리 민족이 미래지향적으로 가는 방식이다. '이슬람=테러리스트'라고 하는 서구가 만들어 놓았던 이런 도그마로 이슬람들을 몰고 가서는 안된다. 물론 테러분자의 유입을 안보라는 면에서 우리가 면밀히 조심해 나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틀 속에서 이 사람들을 끌어안는 열린 다문화정신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슬람이나 또 다른 것을 볼 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도그마로 보면 안된다. 종교적 신앙은 항상 선악구도이다. 특히 일신교는 자기는 선악간 대립이 분명하다. 종교는 철저히 개인적 신앙의 차원에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공적 영역에 침범하면 종교는 선악구도이기 때문에 자기와 다른 가치와 생각은 깨 부셔야 되는 악의 대상으로 볼 위험이 강하다. 자기의 고유한 신앙은 지켜 나가되 그것은 개인 신앙의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면 이슬람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종교적 도그마로 보지 말고 문화적 파트너로 보아야 한다. 문화에는 선악이 없다. 이 문화는 선이고 저 문화는 악이란 논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에는 우열이 없다. 이 문화는 우월하고 저 문화는 열등하다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는 다만 같고 다름의 문제다. 따라서 이슬람 뿐만 아니라 동남아나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도 종교적 도그마로 볼 것이 아니라 같고 다름의 문화로 보고 우리가 끌어안는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우리 문화를 찾아가는 데 있어서도 지금까지 한국사의 사료, 한국에 있었던 역사적 이슈에 머물 것이 아니라 거대한 세계사의 흐름과 역동 속에서 우리 것을 찾고 세계사의 좌표를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우리의 문화가 정확히 읽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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