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의 마음챙김, 그곳에서 위력 나온다

▲ 장오성 교무 / 경기인천교구 송도교당
'일원상 법어'라…. 왜 '법어'라는 말을 썼을까? 깨치지 못한 일반 사람에게 법문, 즉 법어는 경전 속에 있다. 그러나 일원상의 진리를 깨친 사람이라면 그 사람 스스로가 법문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의 육근 동작 하나하나는 곧 법을 설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의 몸과 마음이 움직일 때마다 공정한 진리의 모습으로 발현된다. 진리를 요달한 사람은 어디에도 주한바 없이 마음을 쓰기 때문에 그의 언행 일체는 원만구족 지공무사한 일원상으로 딱딱 찍혀서 나온다. 행위 일체가 법어인 것이다.

진리를 깨친 사람은 나와 너의 구분만이 아니라 인간의 관점과 기준을 초월해서 판단하고 행동한다. 세상 모든 것은 곧 자신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이 우주는 조화로운 한 몸이며 한 지혜광명임을 안다. 밤하늘의 별들은 어두운 배경이 없이는 결코 빛날 수 없다는 게슈탈트 지각이론과 같이, 이 세상 어느 것도 어느 한쪽이 없이 다른 한쪽이 성립될 수 없는 불가분의 한 몸이다.

그 내 몸 우주가 움직이는 원리는 음양상승이다. 이 힘은 유정물이건 무정물이건 하늘이건 땅이건 모든 것에 스며들어 우주인 내 몸을 살아있게 만든다. 그것에 따라 성주괴공도 춘하추동도 생주이멸도 생로병사도 인과보응도 있다. 나의 성품인 우주의 신령한 지혜는 밝고 밝아 비추지 않는 곳이 없이 다 보고 다 알고 있다. 이것을 본 사람을 부처라 하고 아직 보지 못한 사람을 중생이라 부른다.

이것을 확연히 보고 그 힘을 단련한 사람은 내몸, 내마음을 쓸때 다르게 나타난다. 세상 모든 것을 대하는 것은 곧 나를 대하는 것이 되며, 모두가 내것이니 그런 태도는 자체로 원만하고 공정한 것이 된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것이라고 하면 더 소중히 여긴다. 형제 많은 집에 맛난 간식을 놓고 같이 먹으라고 하면 허겁지겁 자기 입에 넣기 바쁘다. 그것을 배분해서 나눠주면 소중히 아껴서 먹는다. 우리는 공공의 물건이나 돈은 별 의식없이 펑펑 쓴다. 그것이 자기것일 때는 아끼고 함부로 하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은 결국 자기것을 가지고 함부로 대하고 함부로 쓰면서 죄만 짓는다. 아는 사람은 모든 것이 내 몸이고 내 물건이요 내 마음임을 알기 때문에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고 모두를 아껴주고 잘 대해준다.

이처럼 큰 나를 발견하는 것이 견성이요, 그 힘을 길러 모두를 소중히 여기고 잘해주는 것이 성불이다. 처처불상 사사불공이 절로 된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육근작용은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된다. 무엇에도 가리고 물들지 않고 내몸 대하듯이 한다. 매 순간에 마음이 딴 곳으로 가있지 않고 일심, 깨어있음, 마음챙김이 지속된다. 그런 상태로 눈을, 귀를, 코를, 입을, 몸을, 마음을 작용하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것이 된다. 그 자체가 법문이 되고 진리의 소식이 되어 흐른다. 일원상 법어가 된다. 대종사님의 일거수 일투족이 법문으로 남듯이 그런 분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법어가 된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요' 스승이 답했다. '앉아 있을 때는 앉아있고, 일어설 때는 일어서고 먹을때는 먹으면 된다' 제자가 되물었다. '그런건 누구나 하는 것이잖아요' 스승이 다시 말했다. '겉모습이야 그렇겠지.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앉아 있을 때는 일어설 일을 걱정하고 있고, 일어설 때는 이미 걸어갈 일을 생각하고, 먹을때도 마음 속은 온갖 다른 것들로 꽉 차 있지 않느냐.'

마음챙김이 있으면 그 순간에 마음이 다른 데로 가지 않는다. 욕심이나 성냄이나 이미 지난 것들이나 아직 오지도 않은 일들로 속이 복잡하다면 이미 마음을 놓쳐버린 것이다. 그런 상태로는 무엇을 하여도 옳지 못한 것이 나온다. 아는 사람은 아무렇게 하여도 아는 것이 나오고 모르는 사람은 아무렇게 하여도 모르는 것이 나온다. 마음챙겨서 했다면, 그 순간에 오롯했다면, 웃어도 울어도 화내도 늦잠자도 모두 바른 것이 된다.

마음챙김, 일심, 참 나를 떠난 상태로 육근 동작을 하여 남들로부터 칭찬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결과가 아무리 좋았어도 그건 헛고생이다. 자신한테 완전히 속은 것이다. 평생 속고만 살다가 힘 하나 갖추지 못하고 가는 사람이 많다.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쓸때 그 순간에 일심, 챙김, 온전함으로 하는가를 지켜봐야 한다. 온전했다면 그 결과는 보잘것 없이 보여도 위대한 것이다. 거기에서 위력이 나오고 지혜와 복이 쌓이며 그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이다. 위력, 기적, 해탈은 그런 마음상태에서 나온 행위의 결과물이지 따로이 추구하여 얻어낼 가치가 아니다.

이곳 송도는 국제도시에 걸맞게 아름답고 쾌적하며, 특히 공원과 자전거도로가 잘 되어있다. 그런데 한가지 맘에 거슬리는 것이 있다. 강가 공원에서 자건거를 타고 운동을 하다보면 제초를 하지 않은 정원이 자꾸 마음에 거슬린다. 예산이 부족해서라고는 하지만 행정을 이렇게밖에 못하나 하면서 관계자들을 비난하느라 마음이 늘 바빴다. 우리들 시민은 쾌적한 환경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는 관념이 깊이 박혀있었다. 그냥 내가 하면 되는 것을 모두가 내몸 내 정원이고 내 일 내가 하면 되는 것을 선을 긋고 업만 짓고 있었다.

그날 이후 호미와 장갑을 사서 운동을 한 후 공원에 풀을 뽑는다. 내 뜰의 풀을 뽑는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한줌씩 뽑다 가기도 하고 애쓴다는 인사를 하며 지나가기도 한다. 알면 그냥 할 일이다. 그때 그때 육근을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사용하면 될 일이다. 뭐그리 속이 시끄러웠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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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상을

깨달은 사람은

육근 동작의

모든 일체 행위가

모두 법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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