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신앙·수행을 함축한 노래

▲ 우세관 교무 / 강원교구 김화교당
성자들께서 깨치신 진리를 간략한 싯구에 담아 법을 전하는 노래를 '게송'이라 합니다. 소태산대종사께서는 원기26년(1941) 1월, 즉 열반 2년반 전에 게송을 공개적으로 내리셨습니다. 이 내용은 〈대종경〉 성리품 31장에 나오지요. 원기26년 1월에 대종사 게송(偈頌)을 내리신 후 말씀하시기를 "유(有)는 변하는 자리요 무(無)는 불변하는 자리나, 유라고도 할 수 없고 무라고도 할 수 없는 자리가 이 자리며, 돌고 돈다, 지극하다 하였으나 이도 또한 가르치기 위하여 강연히 표현한 말에 불과하나니, 구공이다, 구족하다를 논할 여지가 어디에 있으리요. 이 자리가 곧 성품의 진체이니 사랑으로 이 자리를 알아 내려고 말고 관조로써 이 자리를 깨쳐 얻으라."

단어의 직파

멀리 돌지 말고 직파해 봅시다. 유, 무, 구공, 구족이란 말만 확실하면 뜻이 풀립니다. 있을 '유(有)'… 있는 것, 보이는 것은 어때요? 항상 변하지요.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은 점점 헌 것으로 변해갑니다. 심지어 내 육신도 점점 헌 것으로 변해갑니다. 하지만 없을 '무(無)'…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떻습니까? 안 변하지요. 대종사님은 불변하는 자리라고 했습니다.

유는 변하는 것, 무는 안 변하는 것… 한마디로 유무라는 것은 변, 불변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변화'를 말합니다.

다음은 구공과 구족입니다.

구공(俱空)에서 구는 '함께 구(俱)', '모두 구'입니다. 공은 '텅빌 공(空)'해서 함께 텅 비어있다. 모든 것이 텅 비어있다는 말입니다. 텅 빈 것은 뭘 말합니까? 아무것도 없어서 그림자가 없지요. 자취가 없다는 말입니다. 흔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구족(具足)의 구는 '갖추다(具)'는 말입니다. 족(足)자는 '발'이라는 뜻 말고도 '흡족'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흡족하게 다 갖추는 것 그것이 구족입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는 것… 원만구족이라 하지요.

대종사 게송의 원리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돌고 돈다' 하였습니다. 우주는 성주괴공의 과정을 거칩니다. 만물의 생로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춘하추동도 마찬가지지요. 무생물은 성주괴공으로, 생물은 생로병사로, 자연은 춘하추동으로 이렇게 유는 무로 무는 유로 계속해서 돌고 돌지요.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이라 했습니다.

구공(俱空)이라는 것은 함께(俱) 텅 비었다(空)는 말입니다. '유와 무가 구공이다'…이 말은 유에서 무로, 무에서 유로 이렇게 변화하는 것이 흔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법회가 끝나 방석을 잘 정리해 두고 가셔도 법당엔 여러분의 흔적이 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오고 가는 거래 가운데 항상 흔적이 남지요. 흔적을 남기는 것은 결국 왜 그렇습니까? 설익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도가 무르익을수록, 그리고 주인이 될수록 어떻습니까?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어린이법회가 끝나면 방석이 어질러져 있지만 일반법회가 끝나면 방석이 잘 정돈됩니다. 도를 알기 때문이지요. 어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린이들도 예절을 공부합니다. 도 즉 길을 배우지요. 그래서 나중에는 방석을 잘 정돈하고, 집에 가서도 청소를 잘 합니다. 점점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공부를 하는 거지요.

'돌고 돌아 지극해서 구공이 된다'는 말은 수행을 끊임없이 계속해서 흔적이 없게, 모두를 받드는 신앙으로 상(相)이 없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구족(具足)이라, 구족은 '원만하게 다 갖추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흔적이 남지 않는 지극한 수행을 하면, 원만하게 갖추어진 여래가 된다는 말입니다. 게송을 우리네 인생에 대입해 봅시다.

* 유는 무로 무는 유로…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해 가지요. 유무를 말하는 겁니다. 생로병사를 말하는 겁니다. 끊임없이 윤회를 해가는 우리네 인생을 말하는 겁니다.

* 돌고 돌아 지극하면…거래하는 가운데 지극하게 신앙과 수행을 해가면

* 유와 무가 구공이나…흔적이 남지 않아서

* 구공 역시 구족이라…상 없는 부처가 된다 이 말입니다.

진리와 유상 무상의 관계

일원상 진리를 유상, 무상과 연관지어 봅시다. 유상, 무상은 일원상 서원문에 나오지요. 유상은 항상 한다 즉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것, 무상은 항상 함이 없다 즉 끊임없이 변한다는 말이지요. 한마디로 유상은 영원한 것, 무상은 계속 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언어도단의 입정처 자리에서 보면 불생불멸로 항상 존재한다는 유상이 이해되고, 유무초월의 생사문 자리에서 보면 끊임없는 변화로 만물을 생성·화육 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유상의 본체 자리에 의거해 무상의 변화가 만들어 집니다. 대 자리의 불변하는 체에 의거해 소 자리의 인과에 의한 변화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입정처이면서 생사문이지요. 입정의 상태를 떠나지 않고 조화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우리도 본원자리를 지키며 취사를 해야 합니다. 그게 진리적인 삶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지요?

유상이면서 무상이고, 무상이면서 유상이다. 입정처이면서 생사문을 나투고, 생사문을 나투는 가운데 입정처를 떠나지 않는다. 유와 무가 나눠진 것 같지만 결국 하나이니, 입정하는 가운데 생사라는 조화 즉 원만한 취사를 펼쳐가라는 법문입니다. 본원자리를 잘 알고 지키며 취사하는 진리적 삶을 살자. 이것이 게송입니다.

"
본원자리를

잘 알고

지키며

취사하는

진리적 삶을 살자
"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