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의 색깔 화폭에 옮겨
정원을 가꾸는 화가
40여 년의 정교한 붓질

▲ 시원 박태원 화가.
삶을 살다보면 여러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어떤 때는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지나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단호한 방침과 결단으로 자신만의 예술혼을 가꾸며 한국정원의 한 지평을 펼쳐가는 사람이 있다. 바로 한국화 화가 박태후(58) 씨다.

전라남도 나주시에 소재한 그의 집 '죽설헌(竹雪軒)'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태풍 카눈(KHANUN)이 북상하고 있어 비가 멈췄다 그치기를 반복했다. 열기와 습기가 번갈아가며 불쾌지수를 높이고 있었지만 그는 친절한 미소로 맞으며 차를 권했다. 투박하고 올망한 찻잔 밑으로 다 깨진 사발의 밑둥이 찻잔 받침을 대신한다. 그 위로 뜨거운 황차가 더해진다. 그가 무겁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지금 여기 죽설헌에서 그림을 그리고 정원을 가꾸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공직에 20년 동안 근무했죠. 하지만 '전원에서 살고 싶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두 가지 열망을 이루기 위해 오랜 시간을 견뎠습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이 자유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오랜 시간 치밀하고 정교한 계획을 세우듯이 말이죠."

죽설헌에 들어설 때 더위로 소란했던 마음이 S자의 소담한 길로 인해 차분히 가라앉았다. 40여 년의 세월을 통해 만들어진 아름다운 조경 때문이리라.

그가 어릴 적부터 머리 속 막연히 가지고 있던 밑그림들이 33,000여 ㎡의 죽설헌에 노란붓꽃 가득한 연못이며 150여 종의 화초와 수많은 유실수로 그려져 있었다. 더불어 그가 호남 원예고등학교 시절에 심은 꽝꽝나무와 대나무가 오랜 시간을 건너 넉넉한 멋을 연출했다.

"사람들은 제가 이곳을 선친에게 물려받았거나 좋은 곳을 사서 들어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원의 심어진 모든 나무 100% 제가 종자를 채취해 심은 것입니다. 단풍나무는 장성 백양사에서, 동백과 비자는 해남 대흥사에서, 호두와 산벚은 나주 불회사에서 종자를 채취해 심었습니다. 이름난 종자들이 우리 집에 와 모두 거목이 됐죠. 특히 불회사 호두나무는 지금은 사라져 죽설헌의 호두가 그 명맥을 잇고 있는 셈이죠."

계획적으로 나무를 심어 나갔지만 오랜 시간을 통해 적자생존의 법칙과 야생초들이무임주거를 시작하면서부터 더욱 자연스러운 정원이 됐다. 그는 우리나라에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일본과 서양식 정원의 인위적인 손질을 경계했다. 대신 한국정원을 지향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을 최대한 살리려는 정원에 대한 그의 철학을 듣고 있으니 죽설헌의 자연 속에 안기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이처럼 죽설헌은 고위관료가 유유자적하는 집이 아니다. 서민부부가 근검절약을 통해 조금씩 땅을 사서 가꿔온 찾아보기 힘든 정원이라는 점에 의의가 깊다.
▲ 죽설헌에는 기와를 쌓은 담장따라 질경이 길이 펼쳐져 있다.
"예술가가 직접 정원을 꾸린 사례도 몇 있긴 있습니다. 그중 프랑스 화가 모네가 눈에 띕니다. 일본식 정원을 꾸리고 연못의 풍경을 화폭에 담은 '수련' 연작으로 유명하죠. 그 광경을 보기 위해 모네의 지베르니 공원도 직접 가봤습니다."

모네가 넓은 화폭에 수련을 옮겨 심었듯이, 그도 역시 정원이 주는 자연의 모티프를 부지런히 화폭에 옮겨 나갔다.

다른 수식어보다 '참새 작가'로 더 유명한 그다.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느냐 보다 어떻게 그것을 작품화하느냐를 고심한다는 그. 식탁 위에 놓여진 밥그릇 하나도 무심히 보는 일이 없다. 내려다보다가, 옆에서 보고 무릎 꿇고 엎드려 보다가도, 아니다 싶으면 뒤집어엎어 바라보기도 한다. 구도가 뛰어난 그의 참새 연작들이 그의 평소 시선을 대변했다.

"대상에 세세한 눈길을 보내기보다는 그러한 생명을 움트게 하는 기의 원천을 먹의 번짐과 용솟음, 색채의 맑고 투명한 스밈으로 표출하고자 고민해왔습니다."

봄을 대표하는 개나리며 홍매화와 청매화를 즐겨 표현한 것도 그 에너지를 화폭에 담고 싶은 욕망에서 시작됐으리라. 꽃잎이 주는 맑고 밝은 느낌과 거친 매화나무 가지의 질감이 우연적인 농담과 붓의 터치를 통해 거침없이 표현됐다.
▲ 작품 홍매.
그의 모든 작품의 부제는 '자연 속으로'이다. 여태껏 연 모든 전시회 역시 '자연 속으로'라는 일관된 주제를 고수해 왔다. 이는 그가 지향하고자 하는 경향성이 늘 한결같기 때문이다. 영어가 서툴지만 배낭여행을 다니면서 많은 예술작품과 자연을 접한 그가 내린 결론은 결국 가장 한국적이어야 하고, 가장 박태후 같은 것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남의 것을 모방하지 않고 철저히 나만의 목소리를 나만의 방식으로 그려내야 합니다. 작품이 됐든, 정원이 됐든"이라고 말했다. '죽설헌'은 그에게 큰 축복이다. 한 몸의 유기체가 돼 자신이 가꾼 죽설헌의 자연이 또 다른 자연을 불러오게 하고, 그는 그런 죽설헌에서 에너지 넘치는 그림의 모티프를 얻는다. 그리곤 늦은 밤까지 붓을 따라 춤춘다. 그는 공무원 시절 10여 년 동안에도 직장의 일과를 마친 후에는 밤 1~2시까지 꼬박 작품에 매진했다.

"처음엔 줄기차게 대나무 그림만 그렸습니다. 다른 누구 아닌 나의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 대 하나에만 매달렸죠. 그래서 공모전에 당선된 그림도 모두 대 그림입니다. 1985년 집을 짓고 죽설헌이란 당호를 지은 것도 이 때문이죠."

이런 그는 살아가면서 3번의 결정적 시기를 갖게 됐다. 이를 통해 그의 삶을 새롭게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됐다. 자신이 바라는 삶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술 담배를 즐기지 않는 그에게 있어서 어찌보면 자연과 함께 사는 것이 그가 원하는 삶인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첫 번째는 광주교대에 지원해 낙방한 것입니다. 어릴 적부터 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아마 교사가 됐다면 지금쯤 다른 사람이 되어 있겠죠. 두 번째는 행정직과 농촌지도직 시험 합격통보를 받은 후 농촌지도직을 택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원예 및 정원 가꾸기에 '단무지 절여 지듯이' 학습 받게 된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공직 생활 20년을 채우고 그만 둔 것입니다. 같이 그만 두기로 한 동료들 중 저만이 유일하게 약속을 지키고 전원으로 들어왔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내내 결정적인 한 번의 기회만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가 이렇게 정원을 가꾼 것도 '자연 속으로'라는 일관된 주제로 그림을 그려온 것도 결국 원예를 배우던 시절인 17살의 소년 박태후가 가야 할 삶이었으리라.

그는 요즘 일주일에 한 번씩 호남대학교 조경학과에서 강의를 나가고 있다. 미술학이 주전공이지만 조경학과에서 강의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지금은 이 시간이 저에겐 가장 신나고 즐겁습니다. 정원을 가꾸며 들었던 생각들을 말하고, 꼭 필요한 부분은 현장에 데려가 직접 이야기해 줍니다."

그는 적은 연금에도 만족하며 늦게 일어나고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즐거움에 대해 전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31일까지 광주 나인갤러리에서 자연과 관련된 작품을 전시중에 있다. 전시회를 보기 위해 나서며 그가 가꾼 연못 4곳을 둘러봤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연못에 비춰보고 있는 노란붓꽃이 마치 그리스신화의 나르시스 같았다. 생각해 보니 인터뷰 내내 가까운 곳에서 새가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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