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종사께서는 법신불을 상대한다거나, 열반인의 영을 상대하는 등의 무형한 마음으로 무형한 마음을 상대하는 이치를 천만리 밖의 소리를 듣게 하는 '무선전신'과 무정한 식물이 흡수하는 '비료'에 비유해 주셨다.(예도편 2장) 우리는 기도를 통해 집중력 향상과 스트레스 감소 등의 상식적이고 부가적인 '축복'을 넘어 무궁한 천권을 잡아 천지 같은 위력을 얻도록 까지 힘써야 한다.

기도에도 자력과 타력이 겸해야 한다. 호소하고 간청하기에 앞서 각오와 실천을 먼저 고백해야 하며, 소원과 함께 자신의 수행을 서원하는 기도를 빼놓지 말아야 한다.

기도를 드리게 되면 위력과 정력을 아울러 얻게 된다.(권도편 14장) 기도는 진리불공(신앙)이면서 동시에 정신수양 과목이라 할 수 있다. '마음에 사사가 끊어지면 일원의 위력을 얻고, 마음에 망념이 쉬면 일원의 체성에 합일할 수 있다.'(〈정전대의〉 일원상 서원문)는 점에서 본다면 좌선 역시 수양과목이지만 기도가 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 기도와 좌선은 둘이 아니다. 얼마 전 만난 후배가 아침 좌선 시간에 기도를 주로 하는 자신의 교당 분위기를 못마땅해 했다. 기도가 정공부의 지름길이라 하신 정산종사의 말씀을 전해본다.

시험 합격을 기원하는 기도는 누군가의 불합격을 조건으로 하기 때문에 법에 맞지 않다는 어느 동지의 주장을 전적으로 수긍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승패를 가르는 '스포츠'나 생사를 가르는 '전쟁'의 경우라면 그 동지의 논리도 과히 틀리지는 않아 보인다.

원칙적으로 기도는 타인의 행복을 저해하거나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기도를 할 때, 나의 소원이 타인의 소원과 배치되거나 타인의 소원을 침해하지는 않는지를 자세히 살펴볼 일이다.

우리는 행복을 위해 소원하고 기도한다. 문제는 대부분의 세속적인 행복이 '상대적'이다보니, 누군가의 포기 내지 희생을 필연적으로 전제 할 수밖에 없다는데 있다. 정원이 한정되어 있는 대학이 그렇고, 양이 한정되어 있는 재화(財貨)가 그렇다. 많은 교당에서 시험 합격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린다. 교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인가? 연마할 부분이다.

이런 점에서, 서원기도나 참회기도는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도 유익을 준다. 마음공부를 위한 기도나 부처가 되기 위한 기도는 정원이 있거나 승자와 패자가 있는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이기 때문에 부처님 입장에서도 지성으로 발원하고 수행하면 모두 다 들어 줄 수 있다.

제사나 기도 때 위력에 대해 염려하던 지방 교무의 질문에 정산종사는 〈한울안 한이치〉에 "네가 무슨 큰 힘이 있겠느냐, 정성만 다하라"고 하셨다. 나 자신은 물론 남을 위한 기도를 많이 하는 우리들이다. 법력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정성'에 더욱 힘 쓸 일이다.

<미주서부훈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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