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현성 교도·영산선학대학교( 논 설 위 원 )
만남은 참으로 소중하다. 특히 한 인간이 영생토록 닮고 싶고, 모시고 싶은 스승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다. 대산종사께서는 법문집에서 "나는 여기 들어와서 세세생생 이 회상을 떠나지 않고 대종사님을 떠나지 않는다는 최대의 정성과 신심을 가지고 스승님들께 배워 나갔다. 그래서 나는 스승이 많이 계신다"라고 말씀하셨다. 대산 3집, 제1편 제1장의 '나의 스승'에는 대산종사를 이 회상으로 인도해 주신 인도사(引導師), 어린 대산종사를 보살펴 주신 초도사(初導師), 발심사(發心師), 신심을 일으켜 주신 신심사(信心師), 뜻을 세워주신 스승님, 불경과 유학을 가르쳐 주신 스승님들에 대한 회상(回想)이 나와 있다.

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모실 수 있는 스승은 한 분만이 아니다. 나에게도 여러 스승님이 계신다. 나를 처음으로 이 회상에 인도해 주신 '인도사'는 모친인 성타원 김양음 정사이시고, 어린 나를 보살펴 주신 '초도사'와 '발심사'는 유년 법회 때부터 학생 법회, 청년 법회를 거쳐 일반 법회에서 가르침을 주셨던 교무님들이시며, 대종사님과 이 회상에 대한 신심을 갖게 하고 뜻을 세워주신 스승은 예타원 전이창 종사님이시고, 계문의 소중함과 인과의 불매성(不昧性)을 깨우쳐 주신 스승은 향타원 박은국 종사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작년 봄부터 참여하고 있는 대산종사법어 윤문(潤文) 회의에서 만나고 있는 교무님들을 '정전대의'와 '대산 여래 수필법문'을 통해 원불교학을 가르쳐 주시는 교학사(敎學師)들로 모시고 있다.

지금부터 20년 전인 원기77년 삼동원에서 예타원 종사님의 '기도'와 '참회'라는 두 권의 얇은 법문집을 우연히 읽게 되면서 나는 솟아 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그 법문집을 받들고 나서, 나도 그렇게 참회하고 기도하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나 당시 삼동원에 계셨던 농타원 이양신 교무님께 의논드리고 지도를 받으며 생전 처음 108배를 하며 21일 동안 참회의 기도를 올리는데, 계속 눈물이 터져 나와 펑펑 울면서 기도를 올렸다.

21일의 기도가 끝나고도 그 후 몇 년 동안을 기도만 올리면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울고 나서 영생토록 그 법문대로 기도와 참회로 살고 싶다는 뜻을 세울 수 있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어릴 때부터 교당을 다녔고, 유년회, 학생회, 청년회를 다녔음에도 예타원 종사님을 통해서 비로소 대종사님과 정산종사, 대산종사께서 위대한 스승이시라는 것을 알게 될 만큼 나는 그렇게 업이 무거웠고,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대산종사를 처음 뵈었던 것이 1975년 여름 중학교 1학년 때 총부 학생 훈련 날 때였는데, 대산종사께서 공회당에 우리들을 모아놓고 "너희들이 못자리판이다"라고 법문하시던 모습을 처음 뵈었으니 대산종사 재세 시에 얼마든지 인연을 깊게 할 수도 있었으련만 그렇지 못했던 것이 안타까워 예타원 종사님께 "제가 왜 그렇게 대산종사와 인연이 깊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씀을 올리니, "그분의 법문을 많이 읽으면 인연이 깊어진다"라는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었다.

그 말씀을 듣고 나서 시간 날 때마다 대산종사 법문집을 읽곤 하였다. 정전대의는 강의 노트를 요약한 것 같아 잘 이해가 안 되었지만 3집의 법문집을 읽을 때는 깊은 감동이 마음에서 뭉클거리고, 코끝이 찡해오며 과연 위대한 스승이시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이성국 교무님에게 연락이 와서 대산종사 법문집의 법어 편수에 대한 자문에 응해드릴 기회가 있었고, 전공이 국어학이라 〈대종경〉이나 〈정산종사법어〉의 문체로 대산종사의 법어를 엮는 방안에 대해 발표하기도 했다. 바쁜 일과 중에 열 일 젖혀 놓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법문을 많이 읽으면 그 분과 인연이 깊어진다"라는 예타원 종사님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태산대종사, 정산종사, 대산종사의 법문을 받들면서 이분들이 지금도 살아계시는 나의 영원한 스승임을 깨닫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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