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慶山) 조송광(曺頌廣)은 앞에서 다룬 문인들과는 다른 독특한 위상을 가집니다. 첫째, 앞에 분들이 모두 출가교무이었다면 이분은 재가교도로서 교단 내 대표격인 불법연구회 회장을 여러 해 지냈다는 점입니다. 둘째, 종교적으로도 유교 · 선도 · 동학 등 섭렵의 과정을 겪었고, 특히 야소교(개신교)에 독실한 신앙을 바쳐온 존경받는 장로였습니다. 셋째, 명의로 알려진 한의사로 상당한 부와 명예를 누리던 인물이었습니다. 넷째, 문학적으로도 이미 한문에 자부심이 크고 풍월 짓기로 대우받는 원로였습니다. 즉 그는 기독교도, 한의사, 문사로 일급의 명예와 권위를 가진 인물로 소태산의 제자가 되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낸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자, 이쯤이면 그의 문학도 기대되지 않습니까?

1876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공진(工珍), 법명은 송광(頌廣), 법호가 경산(慶山)입니다. 9세에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10년간 사서삼경과 시서백가를 공부하였답니다. 15세부터 종종 시를 짓고 시사(詩社)에도 적극 참여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재능을 자부했던 모양입니다. 19세 때 동학농민항쟁이 일어나자 의분을 일으켜 동학에 입문하고 항쟁에 참여했으나 전봉준이 체포된 뒤로는 좌절에 빠지고 말죠. 이 바람에 한의술을 배우면서 새로운 삶의 길을 모색하게 된 겁니다. 제법 명의 소문을 내며 성업하기도 했습니다. 한때 잡기에 미혹되어 2년간 방랑생활을 하던 끝에 개심하고 야소교에 입신하여 새 출발을 합니다.

43세에는 장로까지 되어 더욱 건실한 신앙생활을 하던 중 1924년 49세 때 소태산대종사를 만나 본 후 큰 각성이 들었습니다. 이듬해 소태산과 정식으로 사제관계를 맺고 입교절차를 밟아 개종하니 가족과 신도들이 마귀에 씌었다고 난리를 치기도 했죠.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과 수행에 모범을 보이어 1928년부터 불법연구회(원불교 전신) 2대 회장에 피선되어 8년간 직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1931년에는 장남을 따라 일본 대판(오사카)에 건너가 머물며 대판교당을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정녀 문열이라는 공타원 조전권을 비롯하여 딸 셋을 전무출신으로 내보내는 한편 신앙과 수행에 정진하다가 1957년에 82세 장수를 누리고 열반에 들었답니다.

경산의 문학유산은 교단 기관지에 발표된 것으로 신시, 시조, 창가, 가사 등 7~8편 있는데, 이밖에도 사후에 발굴된 자서전〈조옥정백년사〉에 20여 수의 한시와 창가, 가사, 시조 등이 실려 있습니다. 자서전에 실린 작품은 테마나 소재가 종교와 무관하여 연구대상에서 제외할 것이 적지 않지만, 대신 경산의 문학관이 드러난 '풍월선유(風月仙遊)' 같은 가사는 색다른 참고자료가 되고, '원시대도(元始大道)' 같은 고준한 글도 있습니다.

그는 '풍월선유'에서 종교와 문학, 도덕주의와 쾌락주의의 갈등을 두고 의미심장한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그는 문학을 신선놀음으로 보는 쾌락주의 문학관에 탐닉한 거죠. 그러다가 도덕주의적 문학관을 가진 소태산의 질책에 승복한 이후 경산문학은 종교적 진리와 도덕적 가치를 담아내는 도구로 일대 변신을 겪게 된 것입니다. 종교문학이 가지는 딜레마를 그는 일찍이 극복했던 것일까요?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