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공존 '법률님 은혜'

▲ 정도연 교무 / 원광대학교 교당
지구촌 시대가 열리고 있는 이때에 법률의 가치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대종사님은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간파하시고 사은 가운데 법률은을 밝히셨습니다.

서품 1장에서 만법이 한 진리의 근원에서 나왔음을 밝히시고, 인도품 1장에서 천도· 지도· 인도의 관계성을 밝혀 도의 동일성을 드러내셨으며, 일원상의 진리에 근원하여 원불교 교법을 제정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주적인 이법을 인간적인 규범으로 정의한 것이 곧 법률은이며, 그러므로 법률은 중에 제1의(義)적인 법은 대종사님의 교법을 의미합니다.

거기에 더 광범한 내용으로 타종교의 법과 그 밖의 도덕 등을 포함시키고, 가정법을 위시하여 세계법에 이르기까지 일체 사회적인 법칙을 통칭하여 법률은으로 정의하게 됩니다.

인도정의의 공정한 법칙이 왜 소중할까요?

법률을 사실적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과거 불교의 불·법·승 삼보 신앙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보신앙에서 법의 신앙은 부처님의 교법에 한정하고 있지만 원불교에서 말하는 법률은 사농공상 간에 인간생활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까지도 다 포함하고 있으므로 매우 포괄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전〉에서 밝혀주시기를 법률이란 '인도 정의의 공정한 법칙'이라고 하였고, 법률의 은혜란 '성자들의 종교나 도덕의 가르침도 법률이고, 사농공상의 기관에서 베풀어 주는 생활에 필요한 지식도 법률이고, 시비이해를 구분하여 안녕, 질서를 유지하는 국가의 법률까지를 포함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대종사께서는 왜 인도정의의 공정한 규범을 이토록 소중하게 생각하셨을까요?

'법(法)'이란 한자는 '삼수변(水)에 갈거(去)'를 하나의 글자로 표현한 것으로 '물 따라 간다'는 뜻이 있습니다. 물 따라 간다고 하는 것은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자연적인 현상을 이르는 것입니다. 물이 낮은 데로 흐르는 것을 보고 여기에 두 가지 의미를 붙인 것이지요.

법(法)은 '물따라 간다', 순리와 공정

하나는 '순리'이며 또 하나는 '공정'입니다. 물은 절대로 역리하는 일이 없습니다. 오직 순리로써 흘러갑니다. 이렇게 흘러 가장 낮은 데로 모이는 곳이 바다이지요. 스스로 낮은 데로만 흘러 결국 드넓은 바다를 이룬 물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공정함과 공평함을 이루고 있습니다.

법은 곧 순리적으로 만인에게 공정해야 하며, 만인은 그 법을 법대로 꼭 지켜야 하는 것은 고금을 막론하고 통하는 원칙입니다. 법은 곧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면 없어서는 안 될 생명처럼 필요한 것이며 하나의 약속된 질서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약속에 의해 법을 만들어놓고 이를 공정하게 지키지 않으면 질서는 파괴되고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인도정의의 공정한 법칙'이란 생명의 공존과 공생의 원리에 바탕한 상호배려요, 존중이요, 아름다운 약속입니다. 아름다운 공존으로 가는 길에는 바로 이 약속에 대한 상호 존중과 순응의 미덕이 동행돼야 함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은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기 때문에 개인의 심신작용을 따라 선과 악으로 나타나며 사회 구성원은 각각 생각, 습관, 욕심 등이 같지 아니하므로 법률이 없으면 전체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주자연의 질서를 깨달은 성현들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법률과 제도가 틀 잡히고 그 법률에 따라 인간들이 바르게 살아가는 세상이 대종사께서 바라셨던 세상이 아니었을까요?

거대한 질서와 합일, 자유와 구속은 아름답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자유롭다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막상 우리가 자유를 느끼는 때는 그 자유가 제한되고 방해를 받을 때이기 십상입니다. 물건은 너무 작아도 보이지 않지만 너무 커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치 우주 속에서 살아가면서 우주를 보지 못하듯이, 은혜도 그 덩치가 너무 크면 무심코 지나치기 쉽습니다.

자유의 구속은 대부분 법률을 통해 이뤄지곤 합니다. 때문에 법률이 우리에게 감사의 대상으로 느껴지기란 그다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의 깊게 바라보면 우주만물이 모두 일정한 법칙 아래 있고 우리의 삶도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세계까지 다양한 법률 아래서 영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현들은 우주자연의 질서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질서를 읽어 주셨고 인간들이 그 질서에 맞춰 조화롭게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과정은 구속스러워도 그 구속이 목적하는 것은 거대한 질서와의 합일이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모든 존재와의 사이좋은 관계형성이었습니다. 그 길이 자유와 해탈 그리고 낙원의 길이지 않을까요?

한 연구에 따르면 전국 6대도시의 성인남녀 1천2백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5.3%가 법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응답했으며, 20대의 경우에는 34%나 법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으며, 또 문제해결의 수단으로 법에 의지하기 보다는 돈과 권력 또는 연줄을 유력한 수단으로 생각한다는 응답을 했다고 합니다.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기로써 지키고, 죽기로써 안하고

어려서부터 법을 지키는 훈련이 되어있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서도 법을 지키는 생활이 점점 불편해 지고 심지어는 손해를 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따라서 적절한 절제는 구속이 아니라 보다 큰 자유를 위한 최소한의 양보임을 자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지켜야할 법은 죽기로써 지키고, 금지된 법은 죽기로써 아니하는 것이 법률 보은의 길입니다. 물론 개인· 가정· 사회· 국가· 세계의 모든 법이 하나 같이 진리성과 공정성이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법률보은의 대체와 근본을 살려 조건 없이 순응하는 것이 법률보은의 실천표준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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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정의의 공정한 법칙
공생 공존의 원리
죽기로써 지켜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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