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지계에 치중했던 과거의 '계'와 달리 '작업취사'는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모든 작업에 빠짐없이 취사케 하는 요긴한 공부이다.(경의편 13장) 삼학뿐 아니라 사요, 사대강령(무아봉공), 일상수행의 요법 5~9조, 최초법어 등 교리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강조되고 있는 대종사의 사회개혁 의지는 '병든 사회와 그 치료법'에서 정점에 이른다.

대종사께서는 이 장에서 현대사회의 병증을 원망병, 의뢰병, 배울 줄 모르는 병, 가르칠 줄 모르는 병, 공익심 없는 병 등 다섯가지로 제시하셨다. 교의품(34장)에서는 개교표어에 담겨 있는 '돈의 병'을 추가로 말씀하셨다. 사요는 병든 사회를 치료할 수 있는 직접적인 해법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공동체)의 가장 큰 병증은 무엇일까? 국가나 교단이나 '소통의 부재'를 부르짖는다. 다양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급속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소통이 부재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유가 뭘까?

법회를 마치고 교도님들과 차를 마시는 중에 한 교도님께서 "사위가 미국 사람이라 마음이 잘 안통해요." 모처럼 대화에 끼어들었다. "교도님,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 사위, 한국 며느리하고는 마음이 잘 통하시나요?" 교도님들은 한바탕 웃고 말았지만 그냥 웃어넘기고 말기에는 왠지 개운치가 않다.

불어를 전혀 모르는 한국 연극 연출가가 한국 배우들보다 프랑스 배우들에게 연극 연출 하는 것이 수월했다는 일화도 있다. 문제는 언어가 아니다. 소통이 부재한 근본적인 이유는 서로간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해서이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보게 되면, 처음에는 답답한 마음이 들다가 무시하게 되고, 급기야는 미운 마음까지도 나게 된다. 먼저 사람마다 특성이 있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겉모습으로만 쉽게 사람을 판단하는 것도 소통 부재의 원인이다. 너무나도 쉽게 내편, 네 편을 가르고 내편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바로 마음을 닫아버린다. 원시시대에는 낯선 상대를 만나면 내편인가, 적인가를 빠르게 판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인간은 첫인상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능력이 진화 되어왔다고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대체적인 판단일 뿐이다.

바늘구멍을 통해 태산을 바라볼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대상이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바라본다는 행위는 그 사람을 이해하는 적절한 방법이 못된다. 왜냐면 사람이란 그림 같은 정적 평면이 아닌 '관계'를 통해 실존하게 되는 가능성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함께 일도 안 해보고, 의견 차이로 충돌도 해보지 않고서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세계 평화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화하는 마음에서 부터 이루어진다고 하셨고(도운편 26장) 전투의 승패는 결국 각개 병사의 전투력이 좌우한다. 마음공부든 사회개혁이든 기점은 자신이 돼야 한다.

<미주서부훈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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