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를 찾는 인간

▲ 김형석 교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날로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원광대학교에서는 대학생들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인문학적 소양을 함양하기 위해 국내외 석학, 저명교수, 전문가를 초청해 '글로벌인문학' 교양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5일 원광대 법학전문대학원 컨퍼런스룸에서 열린 '글로벌인문학' 강좌에서는 연세대학교 김형석(92) 명예교수가 '삶의 의미를 찾는 인간'이란 주제로 특강을 진행했다. 김 명예교수는 우리나라 철학계의 원로이자 저명한 수필가로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열정적인 사회교육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강의에서 "인간이 모든 것의 목적이며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민족과 나라를 걱정하며 사는 삶을 실천해 줄 것"을 주문했다.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서울 종로거리나 강남 테헤란로에 가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위해서 새벽부터 이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는가'라고 물어보면 절대 다수의 개인은 돈을 벌고 우리 사회는 경제성장을 위해서 뛰고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좀 벗어나서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청와대나 광화문, 여의도 국회의사당 옆에 많이 몰려다닌다. 그 사람들을 만나서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종일 뛰어 다니는가'고 물어보면 개인은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정치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뛰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50여년 전만해도 이 두 종류의 사람이 절대 다수였는데 이제 우리 사회가 많이 변하면서 제3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났다. 한마디로 말하면 과학이 발달되면서 기계와 기술에 생활을 쏟고 있는 사람들이다. 대전의 대덕단지도 그렇고 모든 대학의 연구실에 있는 사람은 과학을 배경으로 하는 기계와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 평생을 바치고 열심히 산다.

우리 주변사람들이 거의 다수가 이 세 가지를 위해서 뛰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돈과 경제 권력과 정치, 기계와 기술은 우리의 생활에 필수조건이기에 꼭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목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불행하게 고통을 만들고 있다.

그러면 왜 돈이나 권력 기계와 기술이 그 사회에 어려움을 가져오는가? 그것은 우리가 소유하기 위해서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 그렇다. 돈과 권력을 내가 소유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계와 기술도 전부 특허를 받아서 내가 소유를 해야 한다고 여긴다. 이렇게 소유를 하다보면 소유가 그만 인생의 목적인 듯이 착각하게 된다. 그래서 돈을 위해 살다가 돈 때문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또 정치권력을 찾아서 가다가 그것 때문에 불행해지는 사람을 많이 본다. 우리가 곧 그렇다.

만약에 이승만 대통령이 마지막에 정권을 내놓고 후배에게 양보했다면 그분은 우리 한국에 죠지 워싱톤과 같이 존중받을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정치권력은 내가 가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역사에 어려운 발자취를 남겼다. 또 기계와 기술도 내가 잘못된 목적을 위해서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오고 있다.

돈과 경제, 권력과 정치, 기계와 기술이 꼭 있어야 하지만 그 자체는 목적은 아니고 수단이다. 더 좋은 삶을 위해서 더 좋은 가치를 위해서 있는 것이지 그것을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개인은 전부 불행해 졌다. 그것을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정치가들은 전부 사회에서 버림을 받았다. 그것을 목적으로 생각하는 과학자들은 역사의 비극을 만들게 됐다

이런 것보다도 더 소중한 인생의 목적이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찾아낸 인생의 목적이 하나 있다. 그것이 정신적인 가치이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찾을 때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은 인생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정신적 가치란 학문과 진리의 가치, 예술과 미의 가치, 도덕과 선의 가치 등이다. 이건 우리의 목적이 돼도 괜찮다. 그것은 물질적 가치보다 소중하다. 왜냐하면 이건 소유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돈이나 권력은 소유할 수 있지만 정신적 가치는 소유할 수 없다. 소유하면 없어진다. 정신적 가치는 주기 위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소유가 아니다. 그래서 목적이 되는 것이다.

학문과 진리의 가치가 그렇다. 서양사에 나오는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스승인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잘 알 것이다. 알렉산더는 한 때 전세계를 지배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세계적으로 제일 큰 정치권력을 가졌던 알렉산더는 우리에게 남겨 놓은 게 없지만 조용히 저술을 해서 책을 남겨준 아리스토텔레스는 2천3백년동안 우리를 도와주고 정신적인 지도를 해주고 있다. 이처럼 정신적 가치는 목적이 될만하다. 예술의 가치도 마찬가지다. 도덕과 윤리는 온 인류가 언제나 지켜야 되기 때문에 우리의 목적이 돼도 괜찮다.

그런데 또 여기에 문제가 있다. 예를 들면 칸트와 같은 철학자에게 있어서는 철학이 인생의 목적이 됐지만 철학 밖에서 사는 사람들도 철학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괴테와 같이 유명한 시인에게 있어서는 예술이 목적이 되는데 밖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게 인생의 목적이 예술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 사람에게는 학문과 진리가 목적이고 예술이 목적이 될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의 목적은 되지 못한다.

경제나 정치나 기계와 기술은 인생의 목적은 절대 될 수 없고 수단으로 끝난다. 학문과 예술과 도덕은 반은 목적이고 물량적인 것에 비하면 목적이지만 모든 사람의 목적은 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의 목적이 되는 것도 있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모든 것의 목적이다. 우리의 목숨과 개성, 그리고 인격은 예술가, 학자, 정치가 모두에게 목적이 돼야 한다.

인간의 가치

인간은 무엇인가?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성에 대한 가치이다. 그리고 인격의 가치이다. 이건 절대로 목적이지 수단이 돼서는 안된다. 목적중의 목적이다.

요즘 신문을 보게 되면 어린이한테 성폭행을 했다하는 기사가 이슈가 되고 있는데 그것에 깔려있는 뜻이 무엇인가. 그 어린아이도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는데 짓밟혔다는 것이다. 가장 고귀한 목적을 잃어버렸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문제 가운데 제일 첫째는 인간에 대한 생명의 가치가 절대이다. 이것을 절대로 가볍게 보면 안된다. 내가 세상에 태어났다고 하는 자체가 모든 것의 출발이다. 파스칼은 "우주는 나를 생각할 수 없지만 나는 우주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우주보다 중하다"고 했다. 우리의 인간의 가치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소중한 것이다.

인간의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주고 믿어주고 존중히 여겨줄 줄 아는 것이다. 지금 이것이 자꾸 무너지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가치가 자꾸 무너지고 있다. 정치만 보더라도 우리 정치지도자들이 그렇게 거짓말을 잘한다. 세상에 사람과 더불어 살면서 거짓말 하는 것 만큼 나쁜 것이 없다. 선진국에서는 거짓말은 절대 용서가 안된다. 그래서 대선후보도 정치에 물들지 않는 사람을 선호하고 있는 것이다.

정의는 인간애에 대한 책임

이런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가치가 무너지는 사회를 바로잡는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법이다. 질서로서는 정의의 질서이다.

낮은 사회를 내버려두면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지배하고, 정치권력을 가진 사람이 못 가진 사람을 지배하려 한다.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힘의 사회를 정치와 법의 사회로 바꿔야 한다. 이를 이끌어 가는 가치가 정의 가치다.

지금 전세계가 정의로운 세계를 만들자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 공산주의자들은 정의는 모든 사회를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정의는 평등사회를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구소련, 중국, 북한의 현실을 볼 때 이는 정의라고 볼 수 없다.

미국사람들에게는 정의란 더 많은 사람이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를 가지고 자꾸 성장해야 한다.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평등하게 기회를 주는 것이기에 정의라고 본다. 이것이 미국이 가지고 있는 정의관이다.

또 종교가 가지고 있는 정의관이 있는데 나는 종교의 정의는 인간애에 대한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종교가 구원의 소식을 줘야 하는데 천주교가 그것을 못주고 있다. 불교가 그것을 주지 못하고 있다. 예수가 만약에 지금 우리사회에 와서 큰 예배당 짓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보고 뭐라고 했겠는가. 내가 원하는 건 이것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석가가 와서 불교를 보고 내가 원한 것은 이것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예수나 석가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해주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행복의 가능성을 열어 주기를 원했을 것이다. 이걸 우리가 놓치고 있다. 인간애에 대한 책임을 종교가 상실하고 있고 교육이 그것을 상실하고 있다. 인간애에 대한 책임 이것이 인간의 목적관 가운데 하나이다.

그다음 인간애가 중요하다. 일례로 천주교의 정의구현사제단이 실수를 많이 했다. 그러나 아프리카 수단에 가서 가난하고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해 노력하다가 거기서 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태석이라고 하는 젊은 신부 한 사람 때문에 정의구현사제단이 애썼던 것이다 무너졌어도 천주교는 존경받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하면 사랑이다.

여러분들이 장사를 해도 좋고 기업을 해도 좋고 무엇을 해도 좋다. 다만 이 모든 것이 더 많은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내가 이것을 하고 있다고 하는 목적관을 꼭 가지기 바란다. 그리고 우리 민족과 국가를 위해 걱정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사랑 가운데 사랑이다.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다.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내가 무슨 큰 일을 하겠다고 욕심내지 말고 걱정해라. 그것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우리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귀중한 뜻이다.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 모든 학문과 모든 가치관의 표준이다. 우리는 인간을 위해서 민족과 국가를 걱정하며 사는 삶을 실천해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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