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현성 교도·영산선학대학교( 논 설 위 원 )
지난 번 칼럼 '나의 스승'이 신문에 실린 후, 젊은 교무님으로부터 농담처럼 내 글의 스타일이 '칼럼' 같지 않다는 지적을 받았다.

신문사에서 근무를 하셨던 교무님이어서 그런지 재가 교도가 쓰는 칼럼이라면 당연히 신문의 사설처럼 교단의 이모저모에 대해 날카롭게 문제를 지적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글을 예상했으나 필자의 글이 그런 기대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셨던 모양이다. 불필요한 언쟁으로 스트레스 받지 않으려고 그분의 면전에서는 '소이부답심자한(笑而不答心自閒)'으로 그냥 웃으면서 넘어갔지만 그날 이후 일상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현상(現象)과 본질(本質)의 혼동'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게 됐다. 사실, 그동안 나만큼 현상과 본질을 많이 혼동했던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신문칼럼의 본질은 일종의 '논설적 글'이라는 것이다. 풀어서 말하면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글이다. 따라서 신문칼럼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주장하려는 메시지가 있어야 하고,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이 논리적으로 제시돼야 한다. 그러나 이때 의욕만 앞서서 문제 제기를 거창하게 해서는 안 된다. 거창하게 문제를 제기했다가는 자칫 자신의 주장을 부실하게 뒷받침하는 결과를 낳게 되고 글의 마무리가 엉성하고 허풍스러워져서 처음에 의도했던 설득력을 갖출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지난 번 컬럼 '나의 스승'에서 제기하려했던 문제는 '법문을 잘 읽지 않는 요즘의 세태'였다. 어느 원로교무님께서 '내 법문집 내지 마라. 요즘 누가 법문집 읽는다든'이라는 말씀을 듣고 '스승이란 어떤 존재인가?' 우리 곁에서 스승이 사라지는 요즘의 세태에 대해 한 번쯤 칼럼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최근 대산종사 법문의 편수작업을 하면서 원기99년에 대산 종사 탄신백주년에 출판되는 대산종사의 법문을 우리가 많이 받들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고 그것을 메시지로 다루고 싶었다.

예타원 종사께서 대산종사님을 스승으로 극진히 모시는 것을 뵈오며 가졌던 의문과 바람은 '나는 왜 대산종사님 재세 시에 인연을 깊게 할 수 있었음에도 인연이 깊지 못했을까? 어떻게 해야 인연을 깊게 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는데 '법문을 많이 읽게 되면 그 분과 인연이 깊어진다'라는 예타원 종사님의 가르침이 '법문을 자주 읽자'라는 내 주장의 근거가 됐다. 그 가르침은 종사님으로부터 직접 받들었던 것이었다.

신문칼럼으로 설득력이 강한 글이 되려면 무엇보다 독자와 소통을 해야 한다. 그런데 소태산대종사님만큼 소통을 잘하셨던 분이 계셨을까? 실상사에서 만난 노부부에게 내리신 사실불공과 당처불공의 가르침은 불공의 본질이 상대방과 소통을 하는 데 있고, 그것은 정의(情誼)를 건네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정의란 무엇인가? 나는 정의를 진정(眞情)이라고 본다. 진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참다운 진정은 실제의 생활에서 실천할 때 생기는 것이다. 진리 불공은 진리와의 소통이다. 진리를 실천할 때 진리에게 내 진정이 건네어져 진리와 소통할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원불교인을 설득하려면 원불교의 진리를 실천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원불교인에게 진정을 건넬 수 있게 된다. 스스로 진정이라고 아무리 강변을 해도 실제 생활에서 실천이 없어서 힘을 타지 못하는 것은 이 같은 이치가 있기 때문이다.

원불교 스타일의 소통이란 실천에서 얻어진 진정이 바탕이 돼야 할 것이다. 지금 대산종사의 법문 편수에 작은 정성이라도 보탤 수 있는 것은 '성현과 인연을 깊게 하려면 법문을 읽으라'라는 가르침대로 살아보려 노력했던 내 신앙의 심층구조(深層構造, Deep Structure)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일기를 공개하는 것처럼 부끄러운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 신앙의 심층구조를 공개했던 것은 순전히 독자와의 소통을 위해서였다. 실천 없는 신문사설의 공허한 형식만이 '칼럼'이라고 생각했던 분이라면 원불교 스타일인 내 칼럼에 대해 오해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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