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예술의 주연이던 자연, 영화에서는 조연
인간의 허영 꾸짖는
말없는 가르침은 그대로

지금 우리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점이 달라져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 실제 피부로 접하는 기후변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느껴오는 위기의식은 기존 자연에 대한 우리의 정복적이고 도전적인 자세를 각성하게 만든다.
또한 자본시장에도 친환경 제품이라는 한 축이 생겨나기 시작해 본격적인 관점의 변화가 시작됐다. 이에 발맞춰 본지는 '자연과 만나다'라는 주제 아래 3주 동안 '사람, 책, 영화'를 부제로 자연에 대해 다뤄나갈 예정이다.
▲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포스터.
해질녘 강에 홀로선 노인, 그는 낚시 바늘을 강물에 띄우며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해지는 계곡에 홀로 있을 때면 모든 존재가 내 영혼과 기억 그리고 강의 소리, 희망과 함께 모두 하나의 존재로 어렴풋해지는 것 같다. 그러다 결국 하나로 녹아든다. 그리고 강이 그것을 통해 흐른다."

이는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1999)의 마지막 장면이다. 영화는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들의 희로애락을 모두 담고 태고 적부터 말없이 흘렀을 강 위에서 낚시를 통한 부자와 형제간의 사랑과 우애를 다루고 있다.

자연의 일부였던 인간은 오랜 역사를 통해 자신들이 남겼던 많은 예술작품들에서 자연을 주요 소재로 다루고 그 안에 새겨 넣어왔다. 그리고 19세기 말에야 등장한 영화는 20세기를 거치며 급속도로 발전하는데 영화 역시 많은 작품들에서 자연을 주요 소재로 채택했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는 자연은 기존의 예술작품들에서와는 그 역할이 조금 다르다. 그동안 미술의 진경산수화나 풍경화, 또는 많은 건축물에서 자연은 그 자체로 찬미의 대상이 되고, 예술의 대상 또는 작품을 이루기 위한 조화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동양에서는 예술을 도에 이르는 과정, 즉 자연과 하나 되는 방편이라고 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영화 속 자연은 작품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줄어 영화를 전개하는 배경에 그치거나, 이야기의 보조적 역할에 머무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연만을 주제로 한 작품 역시 미술이나 사진 등에 비해 턱 없이 적어 눈을 씻고 찾아도 쉽지 않을 정도다. 영화에서 만큼은 작품의 주연에서 조연으로 밀려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상업영화에서 자연의 입지는 더욱 좁을 수밖에 없다. 보다 많은 관객을 끌어들여 보다 많은 수익을 내기 위해 따분하고 정적인 이야기 대신 자극적인 소재에 혈안이 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업영화에 등장하는 자연은 대부분 '자연재해'와 같이 난폭한 모습을 하고 있다. 주인공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악당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믹 잭슨 감독의 '볼케이노'(1997)에서는 화산폭발로 인해 용암이 미국 L.A시를 뒤덮는 재앙이 발생하고 주인공들은 이를 막기 위한 사투를 벌인다. 또 롤랜드 에머리히가 메가폰을 잡은 '투모로우'(2004)에서는 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으로 인류가 위기에 직면하는데 그 가운데서 피어나는 부자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국산 블록버스터영화로 주목을 받았던 '해운대'(2009) 역시 장소와 재해의 종류만 달리했을 뿐 위기 속에 드러나는 인간들의 사랑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모든 상업영화가 자연을 악당과 같은 조연으로 취급하는 것은 아니다. 뤽 베송 감독의 '그랑블루'(1988)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프리다이빙 대결을 펼치는 두 친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에서 자크는 어릴적 친구인 엔조와 오랫만에 재회하는데, 그의 초청으로 대회에 참가하면서 보험조사원인 조안나(로잔나 아퀘트 분)와 사랑에 빠진다. 마침내 대회에 자크가 승리하고, 도전 의식이 강한 엔조는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끝없이 잠수를 시도, 결국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 숨진다. 그리고 자크는 자책감과 스스로도 바다와 한 몸에 될 수 없음에 괴로워하다 어느 날 밤, 심연 속으로 잠수해 간다.

또 르네 클레망 감독이 만든 '태양은 가득히'(1960)에서는 일확천금을 꿈꾸는 야심에 가득 찬 청년 톰 리플리는 자신을 하인처럼 대하는 친구 필립을 요트 여행 도중 바다에 밀어 살해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두 작품에서 바다는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당보다는 때론 허영에 사로잡혀 시기, 질투를 발산하고, 때론 사랑을 나누는 인간들을 그저 말없이 받아들이는 유한한 삶에서 무한한 욕구를 뿜어내는 군상들과 대비를 이루고 있다.

또 '흐르는 강물처럼'에서의 강은 가족 간의 우애를 나누고 사랑을 확인하는 매개체적 역할을 하는 동시에 이들에게 인생의 의미를 가르쳐 주는 스승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밖에도 소수이기는 하지만 간간히 선보이는 다큐영화에서는 자연이 종종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다큐영화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로버트 플라어티의 '북극의 나누크'(1922) 역시 인간과 자연의 투쟁 기록을 기록해 만든 영화다. 영국의 존 그리어슨은 미국에서 매스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하던 중 플라어티 작품의 극적인 성격에 주목하여 종래 여행영화나 사실의 기록영화에 쓰이고 있던 프랑스어 도퀴망테르(documentaire)에서 힌트를 얻어 다큐멘터리 필름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영화는 설원에 사는 에스키모인 나누크와 그의 가족의 생활을 그리고 있는데 당시 파테 영화사가 미국과 캐나다 전국에 배급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유럽과 러시아,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상영됐다.

'북극의 나누크'는 흥행을 목적으로 일반 극장에 배급된 최초의 장편 기록영화였다는 점과 에이젠슈타인을 비롯한 당대의 러시아 영화인에서 1960년대의 다큐멘터리 감독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런데 당시 이 영화가 대중들로부터 큰 관심과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낯선 풍물과 이국적인 삶, 거대한 자연의 위력 등에 대해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즉 교통과 통신이 상대적으로 뒤져있던 당시 상황에서 영화는 유희의 수단일 뿐 아니라 새로운 정보를 전달해주는 매체의 역할도 겸하고 있어, 이와 같이 다양한 풍경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을 다룬 기록영화들이 인기를 얻었다.

실제로 1920년대는 아직 '다큐멘터리'라는 용어와 개념이 나타나기 전이었지만, 카메라가 잡은 생생한 현실을 보고 즐기는 관객층은 이미 형성돼 있었다. 이러한 관객들에게 '북극의 나누크'는 익숙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영화였다.

그러나 극영화에서는 1910년대에 이미 장편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촬영과 편집, 극적 구성 등에서 많은 테크닉이 개발돼 일반화되고 있었다. '북극의 나누크'는 바로 이런 극영화 기법을 기록영화에 적용하여 대중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영화에는 관객들의 관심을 끌고 가는 주인공이 있고(순박하고 유능한 에스키모인 나누크),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주제가 있으며(혹독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투쟁), 유머러스한 장면과 긴박한 장면을 넘나드는 흥미진진한 줄거리의 전개가 있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 TV 다큐멘터리로 방영된 후 영화로 다시 제작된 '북극의 눈물'은 북극의 광활한 풍경과 이상기온으로 생사의 기로에 선 동물들과 에스키모의 이야기를 담아 호평을 받았다. 작품에서 끝없이 펼쳐진 얼음평원은 해마다 높아지는 기온으로 인해 사라지고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는 북극의 비극적 상황이 담겨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혹독한 생존 환경이지만 저마다의 생존방식을 통해 북극을 지켜온 모든 생명들이 생사의 기로에 놓이게 된 것이다. 북극곰은 풀과 나무 열매로 허기를 달래며 배고픔을 잊고 순록은 녹아버린 빙하로 물웅덩이를 건너다 익사를 하고 만다. 에스키모라고 불리는 최고의 사냥꾼 이누이트들도 빠르게 녹고 있는 빙하 때문에 사냥을 포기해야 할 상황. 그러나 북극은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사라지는 얼음과 함께 터전은 계속해 줄고 생존에 대한 위협은 커지지만 북극의 생명들은 끊임없이 몸부림을 치며 생을 이어 나가는 그 모습 자체가 감동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렇듯 영화 속 자연은 기존의 예술분야에 비해 홀대 받으면서도 때론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로, 때로는 인간과 뭇 생명들을 살리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등장하며 자신의 자리를 꿋꿋이 지켜오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인간의 교만을 말없이 꾸짖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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