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움직이고 진화하는 평등 '지자본위'

▲ 우세관 교무 / 강원교구 김화교당
'지자(知者)'는 어떤 일이나 행위를 할 때 '나보다 더 아는 이', 혹은 '나보다 더 지혜로운 이'를 말합니다. 그럼 왜 지자를 본위로 해야 하는가, 즉 지혜로운 사람을 스승 삼아야 할까요?

지자본위의 개인적 측면

개인에게 있어서 지자는 눈이요, 수족이요, 힘이요, 영생의 등불이 됩니다. 높이 나는 갈매기가 멀리 봅니다. 같은 사물을 보고도 지식을 쌓은 사람과 그렇지 아니한 사람은 보는 눈이 다릅니다. 그래서 지식은 사람에게 있어 눈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지식을 가르치는 학교의 선생님과 교수님들은 모두 우리 사회의 큰 눈이며 지자입니다.

사람은 흔히 권력(힘)을 갖고자 합니다. 정치·경제·사회의 권력도 결국 모두 지식의 소산입니다. 유비도 제갈량이라는 책사를 두었고, 이번 대선주자들도 모두 나름대로 책사들을 곁에 두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말을 듣고, 지혜로운 사람을 옆에 두면, 즉 지자를 본위로 하면 권력을 갖게 됩니다.

이런 세속적인 힘을 넘어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혜를 연마하면 눈에 보이는 세계를 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영생이 있음을 알아서 윤회의 소식을 알고, 이에따라 인과가 작용함을 알아서, 살아가는 도를 알게 됩니다. 불법에 대한 연마를 깊게 한 선지식과 스승님을 본위로 하면 영생의 등불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처럼 개인에게 있어 지자를 본위로 하면 내 눈과 수족이 되어 천수천안의 관세음보살이 되고, 또 지자를 본위로 하면 세상의 권력을 소유할 수도 있고, 법의 지자를 본위로 하면 영생의 등불을 밝히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한 개인이 지자본위를 하면 여의주를 얻고 알라딘의 요술램프를 얻게 된다는 말이지요.

지자본위의 사회적 측면

그럼 두 번째로 사회적인 측면을 살펴봅시다. 사회적으로는 오로지 지자만을 본위로 하고, 사회에 남아있는 다른 일체의 차별은 없애자는 것입니다. 사회의 일체 차별에 대해서 대종사님은 다섯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양반과 상놈의 차별, 적자와 서자의 차별, 어른과 젊은이의 차별, 남자와 여자의 차별, 인종의 차별이 그것인데 이 같은 불합리한 차별은 인류가 살아오면서 분별 집착으로 펼친 세계입니다.

불합리한 차별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우리는 지자를 본위로 하자는 것입니다. 양반을 본위로 한다든지, 적자나 원조를 본위로 한다든지, 어른들만 본위로 하고, 남자와 우월한 인종들을 본위로 하는 것이 아니라 피나는 노력에 의해 '지혜로운 경지에 도달한 스승'을 본위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자를 본위로 해야 각종 차별을 넘어 평등한 세계가 도래할 것인데, 이것을 '지식을 본위로 한 평등'이라고 합니다. 각자 자력을 양성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권리가 평등해지는 '인권평등'이듯, 지자를 본위로 과거의 차별제도를 없애는 것을 '지식평등'이라 합니다.

지자본위 하는 방법

그럼 어떻게 지자본위를 해야 할까요? 지자본위는 초기 경전에는 '지우(智愚)차별'이라 나와 있습니다. 대종사님은 모든 차별을 없애자고 하셨는데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별만은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바보와 천재를 나누어 두자는 것이 아니라 노력과 경쟁체제를 두어야 사람을 적극적으로 개선하기 때문입니다.

우자(덜 아는 사람)는 잘 배워 지자(더 아는 사람)로 진화해야 하고, 지자도 자기가 잘 안다 하여 자만을 해서는 안 됩니다. 솔성요론 4조에 보면 "지식 있는 사람이 지식이 있다 하여 지식을 놓지 말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은 모르는 것을 배워 알았는가'를 지침으로 배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나 지자가 되고, 인류는 평등해 질 것입니다. 성인(聖人)은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강약 진화의 길이기도 합니다. 결국, 지우차별을 두신 것은 획일적인 평등을 넘어서 진화하는 평등세상을 염원하신 것입니다.

지난해인가요? 100살을 기념해 전시회를 여신 영국의 유명한 할아버지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 밖에 이 할아버지는 그림을 여든에 배우기 시작했답니다. 20년을 몰입해 그림을 그린 것이지요. 65세에 직장에서 물러난 할아버지는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면서 15년을 보냈는데 80이 되었을 때 요양원에 있던 간호사가 취미삼아 붓을 줬던 것이 인연이 되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65세부터 죽음 맞이를 했던 할아버지는 100세가 이 되어서도 살아서 그림전시를 하니 말입니다.

어느날 신문을 보니 90세가 되신 한국의 한 할아버지가 이 소식을 접하고 붓글씨를 시작하셨답니다. 이 할아버지는 60세에 모든 일을 놓고 지내셨는데 돌이켜보니 30년, 자신이 살아왔던 육십년의 절반을 허송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곧 죽는데….'라는 생각을 버리고 최선을 다해 자기 개발을 해서 스피노자처럼 '내일 지구가 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사람'으로 비쳐지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90세의 할아버지가 이렇게 지자본위 하신 것이지요! 이렇게 지자를 본위로 하는 삶은 우리를 진화시킵니다. 약자가 강자로, 그리고 강자는 영원한 강자로 진화시킵니다.

다른 모든 제도적 차별을 없애고, 지자와 우자의 차별만은 두어야 한다는 말씀은 바로 이같이 의식적인 진화를 시켜 가만히 있는 획일적인 평등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며 발전시키는 평등의 세계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우리 삶의 곳곳에서 자존심을 버리고 지자를 본위로 하는 삶을 살기를 염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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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차별을 두신 것은

획일적인 평등 넘어서

진화하는 평등세상

염원하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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