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 종사

'겸손'을 일생의 신조로 잔잔하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숨은 덕행을 실천, 초지일관의 공부심으로 종사 법훈에 오른 김성윤(82) 교도. 그는 종사 수훈의 소감으로 "더 공부 잘 하고 더 정성껏 살라고 주신 것 같다"며 "축하 전화가 오는데 괜히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고 언급했다.

그는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조선은행에 취직해 여성으로 사회에 진출하는 행운을 얻었다. 김정용 원로교무(종사)와 결혼해 정읍 화해리에서 김해운 시할머니와 김도일 시아버지를 모시고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익산으로 이사한 후 원기44년 제일연탄공장을 설립해 은행에 근무한 경력을 살려 사업일선에 뛰어들었다. 그 후 사업을 해서 번 돈의 80은 교단사업에 쓰고, 20은 가족을 위해 쓰자 스스로 굳게 약속했다. 실제로 교단의 구석구석에 큰 정재를 희사해 교화발전에 힘을 보탰다.

하루 일과를 마치면 장부정리하고 현금을 맞추고 나면 밤1시, 2시였으나 이리교당 새벽기도와 좌선에 빠지지 않고 정진했다. 그는 그 때의 일을 '바쁠수록 공부가 일심이 되는 것 같다'고 회고했다.

김정용 원로교무가 공사에 전일하도록 챙겼고, 5남매를 바르게 성장시키며 그의 사업은 제일목재로 확장된다. 하지만 1980년 큰 경계가 다가왔다. 그 큰 경계는 공부심이 아니면 극복하지 못했을 만큼 커서 평소 수행적공하고, 원망하지 않는 삶을 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정토회원으로 권장에 전력하는 한편 자신의 수행정진, 보은자선에도 모범을 보여 교당과 지역사회에 많은 봉사활동을 전개했다. 익산지역 여성단체 모범인 한국부인회 이사, 문화사업회 이사, 가정법률상담소 부이사장, 중앙교구 봉공회 회장, 청소년상담소 이사 등 물심양면의 대희사의 공덕을 나퉜다.

그는 "타인의 장점만 보고 단점은 보지 않고 살면 감사생활이 된다"며 "조석심고와 기도심을 놓지 않고 사는 마음에서 자비심이 우러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집안이 잘 되려면 후진들이 훌륭해야 하는 데 우리 교단은 젊고 유능한 후진들이 많이 들어와 너무 고맙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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