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제민 교도·분당교당( 논 설 위 원 )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이메일 등 손바닥 위로 전달되는 엄청난 정보들과 유튜브를 통해 들어 오는 각종 동영상들의 홍수가 범람하고 있다. 스팸은 그냥 지운다 하더라도 아는 이들이 보내 주는 것들은 읽어 보지도 않고 삭제하자니 미안하기도 하고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시간나면 보리라 하고 일주일만 모아 놓으면 수백건도 넘는다. 댓글이나 답장인사는 엄두를 못낸다. 나름대로의 주장이나 생각을 펼친 글이라면 말이 되건 안 되건 읽어 보는 것도 남의 생각 구경하기라도 되겠지만 대개가 좋은 말이라고 전달해주는 것들이 중국 고전이나 어느 책의 한 구절을 베낀 죽은 글들이다. 공해가 따로 없다. 요즘은 대선 홍보꾼들의 아우성까지 보태진다.

이러한 시대에는 생각을 단순하게 지켜서 말과 글, 그 번잡한 호기심의 늪에 빠져 죽지 않도록 정신을 관리해야 한다. 신문은 제목 위주로 요점을 파악하면 될 것이고 온 세상 사람들이 열광하는 강남스타일에도 관객수가 천만을 돌파한다는 인기영화에도 수천만 명이 즐긴다는 팡 게임에도 마음을 뺏길 것은 없다. 팔로우어가 백만이 넘는다는 어떤 트위트 지존의 팔로우어가 되려고 굳이 애쓸 필요 없고 네티즌의 대수롭지 않은 의견에 댓글 다느라고 시간 낭비할 필요 없다. 우주의 중심에 내가 있으니 남의 생각 따라가기에 정신 빼앗기지 말고 자기 주도의 세상 읽기를 간단하게 마칠 일이다. 짧은 시간 세상 돌아가는 것 파악을 끝낸 후에는 남는 시간 틈나는 대로 기운을 단전에 부리고 한가한 우주정신으로 텅 빈 허공에 합일하여 여유롭게 노닐며 마음의 평화를 즐길 일이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세상을 따라 가느냐고? 세상 관심과 그들이 쏟아 내는 수많은 말들을 쫓아 다녀본들 그 속에 답이 있을까? 표를 구걸하는 자들이 모두 트위트 지존에게 찾아 가서 인사도 해야 하고 여기 저기 기웃거려야 하지만 표를 구걸할 일이 없는 우리는 생명의 힘을 좇을 일이다. 우리 삶의 근원인 은혜의 본질은 빛과 기운이니 우리는 여기에서 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빛과 기운을 함축하지 않고 말과 소리들을 좇아가다가는 영혼의 진액이 말라 정신쇠약과 자아상실에 걸려 시들게 될 것이다. 극에 달한 모습이 자살을 하거나 남의 생명을 살해하는 현상들이다.

좌선과 염불의 기본은 생각의 번잡을 놓고 말을 떠나 내면의 고요함 속에서 빛과 기운을 함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고 그것이 정신수양의 시작이 될 것이다.

말은 시비와 분별을 야기한다. 특히 상대를 놓고 말로써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맞받아침을 불러 오고 이것은 감정의 격앙을 일으키고 기 흐름의 역류를 불러 온다. 얼굴 없는 댓글이 무례하고 인격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말을 놓고 빛의 밝음과 생명의 기운을 찾아 밝고 맑은 기쁨의 에너지를 찾아서 가자. 일단 주변의 번잡함을 그대로 놔둔 채 지금 처한 현장 그 속에서 일분의 틈을 내어 우리의 자성을 보자.

내가 빛과 기운을 찾으면 나에게서 온화한 즐거움이 넘쳐나고 그러면 아이들도 직원들도 마누라도 내 곁에 와서 종알종알 자기들의 얘기들을 해댄다. 그냥 가만히 듣고 있으면서 고개를 끄덕끄덕 해주고 어깨를 툭툭 쳐주면 우리는 서로 간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임을 느끼게 된다. 뭘 가르치려고 옛날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갑갑하게 들먹일 것인가. 우산도 없이 저만치 비 맞고 가는 사람한테 뛰어 가서 내 우산 씌워 주면 좋겠지만 옆에 다가가서 내 우산도 내려놓고 같이 비 맞으며 걷는 것도 좋다. 마주보고 씩 웃으면 될 일! 둘은 세상을 함께 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세상사 인간관계가 비 좀 맞더라도 씩 웃으면 될 일을 비 안 맞자고 말로 따져 가면서 미워해 가면서 산다. 요즘 젊은 부부들이 서양 예절 도입해서 아침 출근길 마다 '자기야 사랑해'라고 하며 산단다. 말을 헤아리며 말을 따져가며 눈치를 보아가며 시들어 가는 영혼에 화학비료 뿌려 가며 사는 모습이다. 말이 필요 없는 사람들은 그냥 쳐다보면 좋은 사람들이다. 빛과 기운속에 사는 원불교 공부인들! (허걱! 이것도 말이네. 그렇다면 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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