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도성 도무·원경고등학교(논설위원)
'스톡데일의 역설'(Stockdale paradox)이란 말이 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8년간 베트남 전쟁의 포로가 된 스톡데일 장군은 20여 차례의 고문을 받으면서도 살아 남았다.

그 비결은 낙관주의에 기대지 않고, 냉혹한 현실을 직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함께 포로가 된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낙관주의자였다고 스톡데일은 말했다. 낙관적인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자, 더 깊은 좌절과 상심으로 그리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 작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긍정의 배신〉을 보면, 초대형 스테디셀러가 된 론다 번의 〈시크릿〉 열풍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전파된 '긍정적 사고'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긍정의 배신〉은 자기계발서, 동기유발 산업, 초대형 교회, 긍정심리학 등, 사회 곳곳에 만연한 긍정주의의 폐해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어, 긍정적 사고에 대한 호의적인 인식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내가 원하는 상황에 집중하고, 그 상황을 또렷이 그리며, 구체적으로 글로 쓰면, 무엇이든 성공할 수 있다는 긍정주의는 도리어 힘든 현실을 외면하게 하고, 현실 개선을 위한 실천에 눈을 감게 한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개인의 실패가 긍정적 사고의 부족으로 생겨난 결과라고 주입함으로써, 사회 구조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수단이 되고 있다 한다.

원불교탄생 100년까지 겨우 3년을 앞두고 있는 지금, 우리도 혹 긍정과 낙관주의의 우산 속에 머물러 있지 않나 살펴볼 일이다. 장기간의 교화 침체는 나아질 기미가 별로 보이지 않은데도, 막연히 개교 100년을 지나면 나아질 것이란 기대 속에 살고 있지는 않는지, '5만년 대운'의 자부심으로 무장한 채, 불가사의한 어떤 위력에 희망을 걸고 있지나 않는지 말이다.

각 교구와 교당에서 비전을 세우고, 비전 내용을 새긴 현수막을 걸고, 구호로 만들어 제창하는 노력들을 보면, 과연 비전 수립이 교화와 얼마나 연결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비전은 곧 미래를 긍정적으로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지금 여기'의 노력을 추동하는 힘이 되어야 하는데, 설정만 있고 현실은 보이지 않으니 답답하다. 비전은, 구호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실천이 있어야 됨은 말할 나위 없다.

출석교도 수를 지금보다 두 배로 잡아놓은 비전은 어떤 실천으로 이룰 수 있는가? 법호인 수를 지금보다 세 배 더 늘여놓은 비전은 어떤 계획을 통해 이룰 수 있는가? 대적공실 법문을 법회 시간마다 외운다고 법위가 향상될까? 우리는 지금 잘 가고 있는 걸까?

긍정은 좋고, 부정은 나쁘다 할 수 없다. 거대한 긍정과 궁극적 낙관을 지향하면서도, 부정의 미학을 끊임없이 수용해야 한다고 본다. 긍정은 긍정만으로 이룰 수 없으며, 부정의 역설을 통해 이룰 수 있다는 균형 감각도 필요하다. 반야심경은 '불(不)'과 '무(無)'의 한없는 부정을 통해 우주적인 긍정에 도달하라고 하고 있다. 소태산의 변산 일성인 '무무역무무, 비비역비비'도 결국 부정으로 긍정하라 하신 역설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긍정적 사고'에 대한 대안으로, 주의 깊은 현실주의와 방어적 비관주의를 제안한다.

100주년을 맞이하기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오고, 희망과 기대가 충만하여, 교단 미래의 아름다운 전망은 우리를 설레게 하지만, 정작 일선 교당 교화의 침체 상황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더 깊이 인식했으면 좋겠다.

장엄, 제도개선, 자비교단 다 중요하지만, 화려한 말잔치보다 우리가 처한 교화 현실, 시대 흐름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더불어, 우리들 자신에 대한 깊은 반성과 아픈 자기 부정으로 적체된 관행을 혁신했으면 좋겠다. 가장 비관적인 상황에 대한 대비도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치밀한 계획과 이에 따른 실천 한 걸음이 없으면 도무지 아니 될 것이다. 개인이나 교단이나 모두 허상과 졸속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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