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수행하는 최상의 공부법

▲ 오선명 교무 / 경남교구 문산교당
눈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 같다는 따뜻한 남쪽 땅 문산에 눈이 내렸습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랑 선생님들이 환성을 지르며 예쁜 산토끼, 곰돌이처럼 기뻐했는데 한 시간 두 시간 계속 내리더니 밤새 내려 온 골목길, 도로, 들판의 논밭, 산하를 하얀 눈으로 뒤덮었고 차디찬 혹한을 불러와 이름 그대로 엄동설한의 동장군이 지금도 기세가 등등 합니다. 새해입니다. 세월도, 우리들의 공부심도 더욱 새로운 희망찬 새 날입니다. 행복하십시오.

일상(日常), 수행(修行), 요법(要法)이란 표현에 주목 합시다.

〈정전〉 제3〈수행편〉에 나타난 일상수행의 요법은 본래 교강 9조라 했는데 '원불교에서 가르치는 핵심적인 실천 수행의 9가지 조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수행의 요법이라는 제목에서 먼저 일상(日常), 수행(修行), 요법(要法)이란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일상(日常)이란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평상의 나날을 뜻합니다. 일상이라는 말과 대비되는 말은 특별한 시간, 일, 환경, 조건, 상황 등 주변에서 접하게 되는 보통의 평범한 범주를 벗어났을 때를 말합니다. 곧 일상은 그냥 우리의 생활 그 자체를 말합니다. 수행(修行)은 글자 그대로 닦는다는 뜻입니다. 닦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더러운 것은 깨끗하게 하고, 흐린 것은 맑게 하고, 구부려진 것은 곧게 펴고, 구멍난 것은 때우고, 막힌 것은 뚫고, 부족한 것은 채우고, 어두운 것은 밝게 하는 등 정도(正道), 정행(正行)이 수행입니다. 요법(要法)은 최고 최상의 방법을 뜻합니다. 정리하면 소태산 대종사께서 평범한 공부인들이 일상의 생활 속에서 수행 적공하여 대도를 얻고 실천하며 높고 거룩한 부처님이 될 수 있도록 밝혀주신 최상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이라는 표현은 내면에 그리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순간순간의 시간과 평범한 나날의 생활이 만들어 내는 일상을 떠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곧 포괄적인 측면에서 일상이라는 표현일 뿐 일상수행의 요법에서의 일상은 찰나의 순간도 수행을 떠나 있을 수 없다는 숨 막힐 정도로 물샐 틈 없는 긴박성과 역동적인 뜻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하루 24시간 전부가 일상이요, 수행이라는 뜻입니다.

일상수행의 요법을 주송문(呪誦文)처럼 외웁시다.

일상수행의 요법을 어떻게 공부하고 계십니까. 흔히 생활 속에서 9가지 조목을 대중 삼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제1조 심지는 원래… 하면서 심지란 마음 땅이니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글자 풀이에 급급하지는 않습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냥 제1조는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하면서 자꾸 주송문처럼 외우다 보면 마음이 대 안정에 든다는 것이고, 자성의 정(定)에 자연스럽게 계합이 된다는 것입니다. 2조, 3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경계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틈이 날 때마다 주송문처럼 외우다 보면 지혜 광명이 솟아올라서 자성의 혜(慧)에 자연스럽게 계합이 된다는 것이요, 심지에 정도(正道) 정행(正行)이 바로 서서 자성의 계(戒)에 자연스럽게 계합이 된다는 것입니다.

4조, 5조, 6조…9조까지 모두 주송문처럼 외우면서 24시간 동안 수행의 벼릿줄이 되어야만 합니다. 만일 목청 높여 외우기만 하고 순간순간, 경계 경계마다 실천하지 못하면 참된 공부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돌리자 돌리자 돌리자 파이팅!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너무나 평범하고 서민적인 어휘를 많이 사용하셨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표현이 일상수행의 요법에 나타난 돌리자입니다.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자 했습니다. 여기에서 돌리자라는 표현이 맞습니까? 혹 잘못 표현하신 것은 아닐까요? 다시 말해 돌리자가 아니라 바꾸자 라는 표현은 어떻습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바꾸자가 아니라 돌리자가 옳습니다. 돌리자라는 표현 속에는 엄청난 역동성이 전제합니다. 마치 사람 키만큼이나 크고 육중한 전동기를 돌린다는 고초와 강렬함을 생각해 봅시다.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자 했는데 24시간 그 어떤 인연 경계에서 절대 감사생활을 하기가 쉽습니까? 차라리 전동기는 돌릴지언정 민감한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원망생활의 업을 타파하고 감사생활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타력생활을 자력생활로 돌리자 했습니다. 타력생활은 한편 참 편리하고 좋습니다. 힘들지도 않고 괴로움도 많지 않습니다. 타력생활에 젖어 있다 보면 그 나름 좋은 면이 있는 듯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력 생활로 돌린다는 것은 매우 힘들고 고되며 극복하기가 쉽지 않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납니다. 타력생활을 쉽게 자력생활로 확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어디 많습니까. 아니지요. 참으로 각오가 단단해야 하고 정신, 육신, 물질 간에 완전한 자력자가 되기 위해서 24시간 조금도 빈틈없이 온 힘을 다해야 가능합니다. 자력은 인격이라 했습니다. 인격은 하루아침에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진 인고의 경계를 극복한 이후에 얻을 수 있는 열매입니다.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잘 배우는 사람으로 돌리자 했습니다. 배움의 기회가 수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배우기란 그리 쉽고 마음 편히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지하고 문맹한 사람이 가르쳐 준다 해서 잘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스스로 각성이 생겨서 배움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남이 가르쳐 주면 자존심 상해라 하고 내가 몰라도 아는 체 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모진 마음을 가지고 특별한 결심을 하여 나의 무지를 벗어나 나의 모자람을 채워야 합니다. 잘 배우는 사람은 잘 가르치기도 합니다. 정성을 다해 잘 가르쳐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사도(師道)가 무너졌다고 말합니다. 온통 진흙탕이라 성직자들도 신뢰가 많이 떨어진 세상이 됐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올바로 세우는 사람은 잘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사욕과 명예를 벗어나 희생과 헌신으로 후진을 이끌고 인도해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에 가장 큰 병중에 하나가 공익심 없는 병입니다. 일상수행의 요법 제 9조, 공익심의 실천은 세상을 건지는 묘방입니다. 인기 연예인들도 기부정도에 따라서 대중의 환영과 질타가 갈라지는 세상이랍니다. 성직자들도 세금을 내야 합니다. 국민 개세(皆稅)주의 원칙을 따르는 것도 공익심을 실천하는 방법이며, 준법정신이 투철한 것도 공익심을 배양하는 한 방법입니다.

찰나를 방심하지 맙시다.

대도는 간이하고 평범하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너무 쉽게 생각하고 느슨한 마음으로 접근합니다. 하지만 원불교의 수행법은 하면 할수록 바늘귀만큼의 틈새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무상한 세월 속에 대각 성불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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