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명암 원경. 산의 상반부 흰점이 월명암이다. 원형 안은 월명암을 확대한 사진. 1943년 박창기선진에 의해 촬영됐다.
▲ 대종사는 진묵대사가 월명암에서 원등암(遠燈庵)을 관했던 것처럼 만덕산을 관하고 정산을 시켜 진묵의 행적을 좇아가게 한다.
달빛이 교교한 밤이었다.
월명암 마당 끝에 서자 그 앞으로 푸르무레한 산세가 겹겹이 물결치고 있었다. 아득히 먼 산의 물결을 보고 있던 학명이 석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거사, 저기 불빛이 보이시오?"
"어디 말입니까?"

"진묵대사께서 여기에서 당신이 출가하신 봉서사 서방산 넘어 목부암을 관했다지 않소. 여기에서 관을 하고 그 절을 찾아가 중창하고 원등암(遠燈庵)이라 고쳤다지 않소."

"……"
석두는 자신이 마치 진묵인 양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무거운지 학명이 다시 물었다.

"거사, 쩌으그 멀고 먼 산에 불빛이 보이시오?"
"……"

보이고 말고요, 석두는 그 말을 하지 않고 그냥 침묵하였다. 푸르무레 겹겹이 물결치는 산세는 실상 어둠에 가라앉아 어디에도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석두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김제에서 대덕 두 분이 나왔지요. 진표율사와 진묵대사, 대사는 전주 근방 절집에 많이 살았지요."

내가 시방 진묵의 그 절집들을 한번 돌아 볼 참이라는 그 말을 석두는 내비치지 않았다.

윗글은 필자가 집필중인 대하소설 〈작은 큰 산〉 4권에 나오는 월명암에서의 학명선사와 석두거사의 대담이다. 석두거사는 달밤에 동천을 바라보며 전전생의 진묵대사와 미래 연지 만덕산을 관한다.

석두거사의 여건이 월명암에 더 있을 처지가 못 되었다. 엿방 물주 송찬오가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들어댔다. 원평에서 송찬오(赤壁)가, 전주에서 김성규(南天)와 문정현(正奎)이, 또 극성스런 증산의 여신도들이 떼로 몰려와 그를 상제님으로 모시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상제님의 신령이 영광양반에게 강림하였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증산 상제님께서 노상 말씀하신 것처럼 그는 극빈의 처지에서 말 그대로 빈자(貧者) 발도심(發道心)하였고, 영광 백수 노루목 초막(草幕)에서 도통하여 성인(聖人) 출(出)하셨고, 또 대마디 열 마디 중 한 마디를 꺾어 스스로 두목이 되셨고, 나머지 아홉 마디를 두어 아홉 제자로 삼아 건감간진손이곤태의 도통수를 주었다.

뿐인가 상제께서 솥이 들썩거리면 미륵이 출현할 날이 멀지 않았니라. 날 보려면 금산사 미륵전으로 오너라, 한 말대로 그가 화천(化天)한 뒤 열 번째 탄강일에 금산사 미륵전의 죽었던 중을 활인하는 이적을 보였다. 가마솥 위의 육장불(六丈佛), 미상불 육척 장신 석두거사는 금산사에서 솥에산(少太山)이라 자호(自號)하여 상제님의 예언과 여합부절했다.

월명암은 부안 변산 쌍선봉에 있는 암자다.
"산에서 내려갈 때가 되었다."

진묵대사는 높은 산 절에 머물 때마다 바로 싫증을 내어 이 말을 곧잘 하였다. 산은 좁아 큰 뜻을 펴지 못한다는 거였다.

석두거사는 진묵의 말이 생각나 송규로 하여금 진묵의 자취를 쫓아가 볼 것을 명하기에 이른다.
아침에 하산하고자 마루에서 내려 선 석두거사가 규를 돌아보며 말했다.

"규는 어디 멀리 갔다와야 항게 내일 내리오니라."
"예"

다음날 아침에 명안이 학명의 방 앞에서 공손히 말한다.

"저기 어디 좀 갔다와야겠심더."
"집에 갈려고?"
"아임더. 외삼촌이……"
"……"
"그럼, 내려가겠심더."

일방적인 통보 같은 것이었다. 학명은 서운했다.
학명이 종일 언짢은 기색을 읽고 철안(학명의 제자)이 와서 일렀다.

"거 보십시오. 지가 진작 말 안하던가요. 명안이 보따리 사들고 내려갔당게요."
"방금 말하고 잠시 내려갔니라."

내게 말이라도 하고 갔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되나. 학명은 서운했다.
석두는 여러 모로 은혜를 진 학명 보기가 미안했다. 얼마동안 두 사람 눈에 규가 안 보이는 게 상책이다 싶었다.

월명암에서 내려온 정산에게 석두거사는 바로 길을 떠나라고 했다.

"어디 네 가고 싶은 데로 가보아라. 그러면 만날 인연을 만날 것이고 후일을 기약할 것이다."
"그래도…… 어디라고 말씀해 주셔야…"
"가다가 전주는 돌아보지 마라."
돌계단을 밟고 내려가는 정산을 거사가 불렀다.

"이거 가져가거라."하며 속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내주었다. 기미년 산상 기도할 때 사용하던 회중시계였다. 아홉 개를 거두어 주어 그걸 팔아서 석두암을 지을 때 사용한 줄 알았는데 하나는 남겨두었던 모양이었다.

"어여 가거라. 내가 한번 기별할 거이니."

풀섶에 이슬이 말랐을 늦은 아침이었다. 정산이 석두의 명을 받고 길을 떠났으나 그가 가는 길은 자연히 전에 익히 다니던 길을 밟을 수 밖에 없다. 눈에 익은 길이 그 사람의 행동반경이 된다.

며칠 뒤, 학명을 보자 먼저 석두는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스님, 지송합니다요. 규를 쓸 일이 있어 어디 보냈습니다."
"……"
학명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명안이 이눔, 니가 규냐 명안이냐. 고얀놈.

송도성은 변산에 있을 때부터 한 가지 취미생활을 갖게 되었다. 가끔 월명암에 심부름을 가 달마상을 치고 있는 학명 주지를 볼 때마다 그 옆에 앉아 넋을 놓고 붓끝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번은 학명이 잠깐 나간 사이에 도성이 한 장을 그려보았다.

"어디 한 장 더 그려보아라."
학명이 돌아와서 보고 권해 도성은 몇 장을 더 그렸다.

"기특하구나!"
이때부터 도성은 서화 치는 재미를 붙였다. 붓과 벼루를 항상 가까이 틈나는 대로 그렸다. 뒷날 송도성이 즐겨 그리는 달마상이 학명의 달마상과 많이 닮았다는 평을 들었다.

석두가 실상사 옆 산기슭에 큰 바위를 의지하여 초당을 짓고 따로 수양처를 정한 뒤부터 정산은 월명암에서 내려간 뒤로 돌아오지 않았다. 학명은 명안이 돌아오지 않자 직접 석두암으로 데리러 왔다.

"거사님, 워째 명안이를 올려보내지 않는게라?"
석두거사가 말했다.

"제 글을 받아 쓸 일이 있어서 여기 머물도록 할 거구만이라."

그래서 피차 입장이 민망하여 석두거사는 명안을 멀리 진안 만덕산에 보내 한철 겨울을 나게 했던 것이다.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학명은 석 달 뒤에 와서 따졌다.

"명안이를 데리고 갔으니 동생이라도 주시오."
학명은 명안 대신 그 동생을 상좌로 달라고 하였다. 석두는 정중히 말하였다.

"스님, 제 시중드는 애도 하나 있어야지라."
하고 석두는 송규·도성 형제를 내주지 않았다.

봉래정사에서 송도성은 석두거사의 시봉을 하는 한편 법문을 듣고 그 기록에 유념하였다. 뒷날 불법연구회에서 달마다 간행되는 〈월말통신〉과 〈회보〉에 실린 봉래정사 법설은 거의 송도성에 의해 발표되었고, 대개 이때의 성리 문답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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