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100년의 성업봉찬 '5대지표'의 하나가 '자신성업봉찬'이며, 그 실천으로 의두의 정진과 훈련의 체질화 등이 있다. 여기에서 깨달음의 한 방법인 의두 성리 연마가 100년성업이 지향하는 주요 과제이며, 그 전신인 문목의 연마는 절실한 일로 다가온다.

그동안 〈원불교신문〉에 140여회의 '문목둘러보기'를 연재하면서 감회가 새롭다. 매주 원고를 송고해야 하는 부담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도 고백하고 싶다. 물론 문목이나 의두 성리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원고를 작성하는데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연재되는 과정에서 심리적 긴장이 적지 않았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본다.

'문목둘러보기'를 연재하면서 이제 종착역에 다가온 만큼 지나온 정거장을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본다. 처음 연재할 때 환기한 문목의 성립과정을 새겨보면서 '문목둘러보기'의 의의를 조망해보고자 한다.

첫째, 문목을 요해하면서 초기교단의 공부풍토를 드러내고자 초기교서의 자료를 중점적으로 활용했다. 소태산 대종사와 선진들의 자취인 〈월말통신〉 〈월보〉 〈회보〉 등에 나타난 초기교단의 사료들을 살펴보면서 본 자료의 할애에 큰 비중을 둔 점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둘째, 현행본 〈교전〉에 나타난 의두 성리의 전신 문목을 인지하는데 시의 적절하였다고 본다. 일부는 문목의 존재조차 몰랐던 경우도 있었을 것이며, 원기12년(1927)부터 시작된 137항의 문목 연마라는 법풍의 궤적을 되돌아보는 것은 원불교100년을 앞두고 의미 있는 일이었다.

셋째, 종교의 생명은 깨달음에 있으며, 일원상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서의 의두와 성리(문목) 연마는 출가 재가의 구도의 역정과도 같다는 것을 누누이 밝혔다. 깨달음에 이르는 일은 원불교 출현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문목둘러보기'를 읽어 보았느냐는 별개이며, 깨달음을 향한 구도적 정열을 지닌 분들이 읽었다면 그 기여도는 적지 않으리라 본다.

문목의 성격상 딱딱한 내용이기 때문에 쉽게 전달하려는 필자의 노력이 얼마나 전달되었는지도 자못 궁금한 일이다. 어느 교무의 정토 왈 "제가 문목둘러보기의 팬인 줄 아세요?"라고 다가와서 관심을 보여준 점이라든가, 육영기관에 근무하는 재가교도가 문목시리즈를 빠뜨리지 않고 읽는다고 했던 점도 감사한 일이다. '문목둘러보기' 137항목을 모두 게재하는데 공간을 허용해준 〈원불교신문사〉, 그리고 교정에 정성을 다해준 관련 기자의 노고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의두와 성리의 이론적 요해(了解)에 더하여 이를 구도의 자세로 실천에 옮기는 일은 우리 모두의 과제이며, 그것이 깨달음의 길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새겨야 한다. 공부하는 교단이라면 더욱 그렇다고 본다.

※ 그동안 문목둘러보기를 연재해 주신 류성태 교무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호 부터는 '이도전 교무가 쓰는 선진읽기'가 연재됩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