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를 쳐 달라" 

영국문화협회가 비영어권국가 4만명을 대상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를 조사했다. 그 결과는 mother(어머니)였다. 우리 교단의 어머니 계보를 이은 용타원(龍陀圓) 서대인종사. 무심한 듯 오가는 인연에 걸림이 없었다. 그러나 선진을 받들고, 후진을 격려하며 두루 챙기며, 자비와 덕화로 교단의 대소사를 주밀하게 살피는 회상의 어머니요, 자비보살이요, 큰 스승이다.

17세 되던 해, 원기16년 사촌오빠인 원산 서대원대봉도의 인도로 불법연구회를 찾았다. 대종사께서는 대인(大仁)이란 법명을 내리셨다. 그러시며"사람은 대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어진 마음을 가져야 한다. 대의와 어짐이 도인의 근본 바탕이 된다. 좋은 이름이니 이름값해서 일체생령에게 유익을 주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입교를 하고 바로 경오하선에 입선을 했다. 하선 해제 후 육타원 이동진화 종사를 따라 서울교당 간사로 근무했다. 원기26년 초량교당 부교무를 시작으로 마령·서울·영산교당 등에서 교화활동을 했다. 이후 감사부장, 교육부장, 감찰원장, 수도원장직을 수행하면서 대산종사의 경륜을 받들어 보필했다. 특히 감찰원장직을 수행하면서 어렵고 힘든 곳을 두루 살피며 잘못을 들추기보다는 감싸 안아 기강을 바로 세우며 화합교단으로 이끌었다.

'대의정신을 갖자. 공명정대하게 살자. 사랑과 용서로 보은하자'는 용타원종사의 좌우명이다. 그의 삶은 좌우명 그대로였다. 소태산대종사에서 좌산종법사에 이르기까지 사대(四代)를 통해 70여 성상을 대의와 신의로 일이관지했다. 특히 좌산종법사가 주법으로 선출되자 교단원로들과 함께 오체투지로 교단의 대의를 세워 주었다.

퇴임 후 수도원에서 생활은 일생 중 백미였다. "수도원에 들어오면서 토굴에 들어오는 심경으로 왔다"며 20여 년을 한결같이 기도일념으로 사시정진 하는 공부심으로 일관했다. 대중작업은 물론 틈틈이 염주와 교무들의 수용품을 만들어 후진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며 철저한 자력생활을 했다. 거목처럼 시원한 그늘이 되고 스승님들의 법맥과 신맥을 굳건히 이어주는 사표가 되었다.

그는 대사식을 앞둔 당시 대산종법사에게 교단 사상 처음으로 생전 열반법문을 간청했다. 대산종사는 "서가출가 시방일가(徐家出家十方一家) 대덕무덕 제생의세(大德無德濟生醫世) 인자무사 사생일신(仁者無私四生一身) 용상대정 중도세계(龍象大定中道世界)"란 법문을 내렸다. 이 법문을 받고 10여년을 더 사는 동안 기원문처럼 연마하여 생사를 초월해 오도 옴이 없고, 가도 감이 없는 열반상을 나투었다.

"나는 행복하다. 여한이 없다. 이제 나는 진리계에 식목했다. 고목은 그만 버리고 새순으로 오겠다. 나의 가는 길을 축하하고 박수를 쳐 달라" 열반의 순간까지 청정 일념을 모아 사바를 향해 던진 사자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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