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에 녹아든 우리들의 삶과 죽음

최근 〈원광문학〉 11호를 통해 소설가 박범신 작가의 수필 '버킷리스트, 시간의 유속에 실려가며'를 읽었다. '버킷리스트'라는 낯설지 않은 단어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버킷리스트란 우리가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나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리스트를 말한다.

그가 아내와 함께 버킷리스트를 하나하나 실현해 가는 그 기분도 궁금했다. 혹여 숙제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12일 그는 인도로 떠났다. 아내의 버킷리스트의 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쯤 그는 아내와 함께 타지마할, 오차, 카주라호, 바라나시, 사르나트 등을 여행하며 영혼의 힐링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인도로 떠나기 전, 7일 오후2시 탑정호수가 내려 다 보이는 논산의 조정리 집에서 그의 작품 속에 녹아든 우리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긴 이야기를 풀어봤다.

- 버킷리스트에 적힌 나라로 아내와 함께 떠나실 계획인데 어떤 마음인지. 또 작가로서 버킷리스트는 무엇인지.

아내와 40년을 함께 살았다. 나는 결혼하면 사랑이 완성되는 것으로 알았다. 착각이었다. 사랑에는 완성이 없었다. 갈고 닦는 긴 과정임을 알았다. 아내와의 관계는 이승의 인연뿐 아니라 죽음이후 까지도 연결됨을 알았다. 다음 세상에 까지 걸쳐져 있는 초월적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아내의 버킷리스트에 있는 만리장성, 그랜드캐년, 히말라야를 여행했다. 올해는 인도를 열흘간 여행한다. 나는 다 가 본 곳이다. 다만 아내를 위해 가이드 겸 동반자로 가는 것이다. 여행을 통해 아내와 진실로 함께 있음을 느낀다. 나의 버킷리스트는 아내와 함께 그렇게 다니는 것이다. 젊을 때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 '언제든, 마지막 날이 오면 당신 곁에서 죽을 거야!' 이 말을 할 당시에는 철없이 아내에게 던진 작업멘트였다고 했다. 지금은 또 다르게 해석 될 것으로 보인다.

연애할 때 그런 말을 했다. 뒤돌아보면 철없이 했구나 싶다. 살아보니 누구와 함께 수 십 년 아이를 낳고 사는 것이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그런 여정이 고맙고 감사하다. 이승과 저승, 초월의 꿈이 들어와 있는 언니(여자)는 아내뿐이다.

- 1993년 돌연 절필을 선언했다. 작가로서 죽음을 선택한 것이라 본다. 3년의 공백을 갖은 후 〈흰 소가 끄는 수레〉를 발표했다. 흰 소는 목우십도송에서 백우로 온갖 사심잡념이 끊어진 깨달음의 경지에 달한 소를 지칭한다. 결국, 절필 이후 선생님은 '흰 소'로 환생을 한 것이라 느껴진다. 어떤 깨달음을 갖고 환생한 것인가.

작가로서의 자기 죽음을 선언한 것이다.
2~3년 용인에서 사회 활동을 하지 않았다. 관 속에 있는 느낌이었다. 후회는 없다. 오히려 그런 시간이 삶의 바르도(bardo), 즉 과정이었다. 어떤 것은 소멸하지만 어떤 것은 시작하는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절필을 통해 지금의 작가 박범신으로 새로 태어난 것이다. 지금 비교적 행복하고 만족하다. '흰 소'를 그리워하게 됐다. 마음에 흰 소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귀한 것이다. 마음에 흰 소라도 품고 산다면 흰 소를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과 다르다. 소설 속에서 나오는 두 작가를 통해 각자의 자아상을 보게 했다. 흰 소를 타고 싶은 소망을 가진 자와 그 소를 탈수 없는 고통을 드러낸 소설이다.

- '문학은 목매달아 죽어도 좋을 나무', '문학을 위해서라면 내가 가진 기득권을 언제든 내려놓을 수 있다'는 고백을 했다. 늘 이야기의 연결고리에서 '죽음'에 대한 단서를 붙이는 경향이 있다. 상황 따라 혹은 작품 속에서 해석하는 죽음에 대한 단상이 궁금하다.

내게는 문학순정주의, 문학제일주의 즉 문예반 소년 같은 정신이 지금도 있다. 이제는 프로가 될 때도 됐는데…. 문학을 생각하면 아직도 순정주의가 된다. 그래서 문학은 목매달아 죽어도 좋은 나무이다. 문학은 긴 연애와 같다. 아직도 강력한 긴장이 있다. 그러므로 지금도 연애중인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평생 내 곁에 있다. 오히려 10대 때 죽음을 더 이해했다. 늙는다고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에 대한 정보만 늘어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 더 가깝고 깊게 느끼고 이해했던 것은 10대 때였다.

죽음은 누구나 공평하게 부여되는 고통이자 슬픔이다. 탄생 이전부터 부여 받은 슬픔이다. 마치 과일 속에 씨가 있듯이 우리 몸속에 죽음의 씨를 갖고 나온다.

죽음은 육체와 정신 속에 깃들어 있다. 다만 어떤 환경에 의해서 더 일찍 죽음의 씨앗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나는 내 환경 탓에 젊은 날 여러 차례 자살 미수를 경험했다. 내 안에는 나를 죽이고 싶은 자기 살해의 욕망이 있다. 우울증이었는지도 모른다. 자기 죽음의 욕망이나 슬픔이 내 삶에서는 평생을 거쳐 에너지가 됐다. 이것과 싸우면서 부가적으로 얻는 것이 소설이다. 소설이 저절로 된 것이 아니다. 사실 본질적으로 말하면 내면에서 죽음이란 것과 예민한 싸움을 한 것이다. 싸움은 나를 몹시 긴장하게 한다. 그 긴장감은 상상력을 끝없이 건드려 준다. 그래서 지금도 감수성이 안 늙은 것이라 본다. 요즘도 사람들은 나를 청년작가라고 칭한다. 결국 죽음은 작가인 내게 에너지의 원천인 셈이다.

- 소설 〈은교〉에서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입장에 대해 '담담함'이 엿보인다. 혹 누군가도 그럴 것이다는 생각에서 쓴 묘사인지.

노인의 심정을 기록한 것이다. 젊을 때는 절제로 살았는데 늙어서는 억압된 오욕칠정이 폭발하는 경험을 한 것이다. 실제로 인간의 본성 속에는 누구나 오욕칠정이 다 있는 것이다. 주인공 이적요의 욕망은 사회에서는 노욕이라 한다. 노욕이란 말 속에는 나쁘다는 것이 갊아 있다. 청년들 욕망을 청욕이라 안한다. 사회적 관점이 잘못돼 있다. 노욕은 나쁘지 않다. 노욕에 대한 고정관념을 반역하는 것이다.

- 사람들 평균 수명이 늘어간다. 소설 〈은교〉의 주인공 같은 심리를 가진 사람이 많은 세상이다.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어른들에 대한 위로의 말을 해 준다면.

요즘 한겨레신문에 소설 '소금'을 연재하고 있다. 주 내용은 기성세대의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젊은이들이 좀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소통을 배운 세대가 먼저 손을 내밀면 좋겠다는 뜻이다.

기성세대는 부정적인 것이 많다. 압축 성장을 하다 보니 사회의 그늘도 많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 세대가 이 사회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욕하기도 한다. 압축 성장의 과정에서 이러한 부를 얻어 냈다. 그러니 부작용은 젊은 너희들이 감당해서 개선해 가라는 것이다. 60~70세 어르신들은 이 나라에서 놀라운 부를 만들어 왔다. 그런데 현재 대접은 조금밖에 못 받고 있다.

젊은 자식세대들은 아버지들이 살아 왔던 가치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아버지 세대는 일하느라고 소통의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부당해도 무조건 복종하며 일 만 했다.

젊은 세대들이 아버지에게 문을 열고 나 올 수 있도록 도와 줘야 한다. 서로간 책임이 있는 것이다. 아버지들은 지금 젊은이들처럼 소통과 갖가지 문화를 경험한 적이 없다. 젊은 우리가 아버지들을 쓰다듬어 주고 가르쳐 줘야 한다. 그래야 한다.

- 어느 잡지에서 '100볼트 플러그에 220볼트 전열 기구를 꽂아 쓰는 세상 같다'고 표현했다. 자본주의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는.

우리 역량과 정신은 100이란 에너지이다. 하지만 사회가 우리를 200으로 살도록 하고 있다. 정신이 불안하다. 긴장할 수밖에 없다. 오버해서 살아야 하니 내 마음속에 있는 본래는 외출간지 오래됐다. 삶이 불안하지 않으려면 내 속에서 내 본원과 사는 것이 일치하면 평화스럽다.

삶의 태도나 양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행복해 지는 길을 찾아야 한다. 본성적인 나로 돌아와서 나로 합쳐지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주체를 확립하지 않으면 유랑인으로 살게 된다. 자본주의 노예처럼 살면 안된다. 자본주의를 내 삶의 아래 단계 즉 전략으로 삼아야 한다. 자본주의를 신처럼 모시면 안된다. 이런 삶을 지도부가 바꿔주지는 않는다. 확실한 것은 자기 주체를 두렷이 갖는 것이다.

사진 = 이여원 기자 hyun@wo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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