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산종사.
실상동에서 줄포만 산 밖으로 나가는 지름길은 아랫마을 칠보대기에서 시작된다. 칠보대기 개울 건너 묏골로 들어서 묏등바위 아래 재를 넘어가면 불당골, 여기서 와룡골(뱀골이라고도 한다)의 절경을 완상하며 가다가 가마소에서 왼쪽 회양골로 거슬러 오르면 우바위재. 재 너머 보이는 바위가 꼭 암소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 같다.

산 아래 우동리 사람들은 굴바위라 부른다. 바위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다른 모양이어서, 어쩌면 코끼리 같기도 해 정작 바위 아래 가서 보면 그것은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는 동굴이다.

굴바위에서 내려오면 개울 건너 기암절벽이 눈길을 끈다. 이름하여 성계폭포, 가물 때는 절벽에 불과하나 비 온 뒤 폭포수가 절경이다. 실상동에서 우동리 아래 만화 마을까지 2시간. 이때부터 정산은 아무도 없을 때 가만히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보는 버릇이 생겼다.

고부 쪽으로 방향을 잡아 가노라면 변산 자락을 벗어나 영전 네거리에 이른다. 영전에서 부안과 줄포간의 갈림길이 나오고 여기서 곧장 고부로 지름길을 잡아 밭두렁 길을 가면, 전면 들판 건너 두승산(斗升山) 산세가 시야를 막는다. 들판을 가로질러 율지 마을에 이르니 영전에서 1시간 걸렸다.

들판으로 난 직선 신작로를 속보로 20분 걸으면 관청리다. 쇠정이 마을을 관청리라 부르게 된 것은 일제가 조선의 토지를 강점하면서 간척사업을 전개함에 따라 수리조합, 농장, 창고등 관청이 들어서면서 번화한 마을이 되면서부터다.

쇠정에서 고부면 소재지까지는 30분 거리, 조병갑이 농민들을 탐학하여 마침내 전봉준을 중심으로 민중이 봉기하였던 동학혁명의 진원지이다.
▲ 변산 실상동에서 완주 만덕산 미륵사까지 정산종사가 걸어간 길.

고부 고을 산기슭에 수백년 되었음직한 고목 세 그루가 버티고 선 것이 눈에 띈다. 세 아름이나 됨직한 이 고목나무는 뿌리가 지면으로 기어나와 서로 얽혀 있다.

정산은 여기서 잠시 다리쉼을 하며 오른 쪽 두승산으로 눈길을 주었다. 두승산 아래 선돌마을(立石里)은 선돌댁의 시댁이다. 증산의 여동생 그녀는 박창국과 결혼, 아기를 낳지 못하여 손바래기 친정에 돌아와 있다가 정산과 경상도 성주로 동행하여 석달열흘 동안 태을주 치성을 들였던 인연이다. 정산이 화해리에서 7개월간 머물 때도 그녀와 친교가 깊었다.

선돌댁은 그 이후 함안 사람 조철제(趙喆濟)와 동사하여 무극도를 하였고 무극도주 조철제는 증산의 유족 정씨부인과 외동딸 강이순(강순임의 아명)을 거두게 된다. 그를 기화로 조철제는 시루와 솥은 불가분의 관계(甑鼎不離)라 주장하여 스스로 호를 정산(鼎山)이라 하였다.

소태산 또한 변산 봉래정사에서 아홉 제자들에게 법호를 주면서 구수산 해안 두개의 솥섬과 칠산도를 따, 여덟제자에게는 칠산도를 주고, 큰소드랑섬은 당신이, 중앙 규에게 작은소드랑섬을 주며 정산이라 하였으니 선돌부인을 반연하여 조정산과 송정산은 참 묘한 인연이라 하겠다.
▲ 보천교(태을교) 교주 월곡 차경석.

월곡 차경석(月谷車京石)은 병진년(1916) 동짓날을 기하여 교단조직을 완전히 자기 앞으로 집중시켰다. 태을교 조직을 강화하는 작업으로 역의 원리에 근거하여 24방주제를 만들어 심복을 24방주(方主)로 임명하고 각 지방에 파견하여 신도들을 관리하였다.

월곡은 자기가 추천하여 증산의 수부(首婦)가 된 이종누이 고 부인을 볼 때마다 고까운 맘이 들었다. 자기를 두고 "동갑 장사하면 이익이 남는다" 할 때는 언제고, 한창 기가 나서 설칠 때는 원평 송찬오 엿방에서 자기 눈두덩을 차 눈이 퉁퉁 부어올랐던 일이며, 동갑 사촌인 자기를 보면 "네 이놈, 경석아!" 하고 함부로 부르는 것이 남 보기에 체면이 손상되므로 그녀가 옆에 있는 것이 영 불편하였다. 그래서 고 부인과 신도들 사이의 신맥을 끊기 위해, 그녀가 거처하는 방의 격을 높여 '영실(靈室)'이라 해놓고 방문에 주렴까지 쳐 놓고는 '예문(禮門)'이라 하여 자신의 허락 없이는 신도들의 출입을 금하고 자기 아내 이씨만이 고 부인의 수발을 들게 하였다. 이는 겉으로는 고 부인을 높이는 체하면서 실제로는 신도들이 고 부인을 만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책이었다.

송도군은 가야산에서 도공부를 하다가 스승 찾아 처음으로 전라도에 와 원평 엿집 물주 송찬오를 통하여 정읍 입암면 대흥리 태을도 본소에 온 것은 정사년(1917) 4월이었다. 증산상제는 화천하였으므로 사모님을 모시러 왔으나 만나지도 못하고 다음날 아침에 월곡 차경석을 만나게 되었다. 도군은 유학자 풍모의 우람한 체구에 눌려 월곡에게 고개를 숙였다.

"큰일을 벌이고 계신단 말을 듣고 왔심더. 우째 하는 기 참말로 천하 창생을 위한 천하 대삽니껴?"
월곡은 작은 키에 해사한 얼굴의 경상도 소년을 한번 아래위로 훑어보고 픽 웃으며

"미경사(未經事) 소년이 말만 옹통스럽군."

경험도 없는 어린 사람이 무얼 아느냐고 핀잔만 주었다. 사모님을 모시러 왔다는 도군의 당돌한 청에 월곡은 대꾸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무안을 당하고 자리에서 물러나와서, 도군은 다시 사모님 만날 길을 모색해 보았으나 주변의 사람들의 한결 같은 말이 '사모님은 광기가 있어 외인 대면을 못하고 있는중'이라 하였다. 도군은 화가 났다.

"말도 아이다! 미친 사람 볼라고 내가 천리 길을 달려왔단 말이가!"
도군은 아무래도 차경석이 미덥질 못하였다. 원평 엿집으로 돌아가 뒷일을 도모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진짜배기 사모님이 계시는데…"

고 부인을 만나지 못하고 낙담한 도군에게 송찬오는 상제님의 본댁을 찾아가 보는 것이 어떻겠냐며 안을 내었다.

"구월리 안통 우물이 있는데 가면 쪽물치마 입은 아줌씨가 있을 것잉게 내 이야그하고 그 아짐한테 물어보소."

구월리 안통 우물터를 찾아갔더니 과연 쪽물치마 입은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나오므로 도군이 공손히 절을 하고 찾아온 사유를 말했다.

"아지매, 말심 좀 묻겠심더. 상제님 본댁에 좀 찾아갈라 카는데요."
"워메, 경상도 양반이그만이라. 참말로 잘 생기기도 혔네."

아주머니는 매우 호기심이 어린 얼굴로, 참말로 이쁘게도 생긴 소년 도꾼도 다 있네, 반색을 했다.
"어여 지 따라 오시기라. 나도 거게 갈 일이 있은께."

어제 차경석에게 냉대를 당한 경험이 있는 도군은, 전라도 아지매는 내외도 하지 않고 참 친절도 하구나, 내심 감복했다.

덕천들에 들어서자 들판 가운데 우뚝 솟은 산이 나타났다.

"저게가 상제님이 태어나신 동네여라."
"무슨 산인데예?"
"두승산이지라. 그 아래 작은 봉우리가 시루봉이제요."

하하! 도군은 절로 찬탄이 터졌다. 경상도 산골에서 한번도 보지 못한 넓은 들판이었다. 가히 호남 곡창의 중심부라 일컬을만한 그 들판 한켠에 우뚝 솟은 풍요를 상징하는 말(斗)과 되(升)의 뫼 두승산, 그리고 떡시루를 상징하는 시루봉, 상제님은 덕천들 넓은 들을 가슴에 안으며 탄생하셨구나. 상제께서 풍요를 상징하는 산천의 정기를 타고 이 땅에 오셨음이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도군은 알 수 없는 기운이 솟는 것 같았다.

증산의 생가는 두승산 시루봉 아래 손바래기 마을이었다.
▲ 박용덕 교무 / 군북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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