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의학회 창립 염원

▲ 백정윤 교무 / 원광대학병원
나는 7세 때 어머니를 따라 총부에 와서 정산종사님을 뵙는 자리에서 정윤(正潤)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연세대학교 의예과 1학년이 끝나가는 원기59년 1월 어느 날 밤 10시경 나는 다시 총부를 찾게 됐다. 당시 총무 과장이셨던 장응철 교무님의 권유로 다음 날 아침에 대산종사님을 뵙게 됐다. 직접 뵈니 마치 큰 거인이 앉아 계신 듯 했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보통 사람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다. 대산종사님은 여름방학 때 신도안에 오라고 하시며 청년회 활동을 권하셨다. 그 후 나는 원남교당 청년회에 나가게 됐다.

그 해 8월 여름 계룡산 주위에 비가 많이 왔었다. 대산종사님이 신도안 삼동원에 머물고 있던 최희공(당시 한국과학원 대학원생)원무와 나를 밤에 찾으셨다. 대산종사님은 '대선원, 대학원, 대병원, 대농원, 대공장, 대기업'이라고 쓴 나무판을 보여 주시면서 6대 기관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이러한 기반들이 확립될 때 우리 교단의 교화활동이 더욱 크게 빛을 볼 것이라는 말씀을 나는 항상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

그 후 나는 혼자 또는 부모님(아버지 거산 백경진 대호법, 어머니 진타원 임현진)을 따라 신도안, 초기 벌곡 삼동원, 영산, 완도, 원평, 수계농원, 왕궁 등에서 대산종사님을 뵙곤 했다. 어느 날 대산종사님은 여러 교무,와 교도들 앞에서 나를 소개하시면서 갑자기 전무출신 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고, 그 후 여러 번 공개적으로 말씀하셨다. 처음 나는 전무출신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아버지는 당신도 모르는 아들의 삶을 어째서 대산종사님이 그렇게 결정하시는지 의아해 하셨다. 공무원으로 청빈하게 살아온 아버지는 아들이 의사를 하면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저 어르신이 꼼짝 못하게 하려고 그러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그 후 나는 출가생활이 더 행복할 것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됐다. 대산종사님이 아무나 출가를 권유하시지 않는 것도 알았다. 원기75년에 대산종사님은 내게 특인 교무를 승인하셨다. 교학과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특인 이외는 달리 전무출신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원기79년이 돼서야 정신건강의학과 조교수 시절에 교무로 출가를 하게 됐다.

대산종사는 원기77년에 당시 종법사 주치의였던 김상수 교수를 시켜 나와 일원의학회 창립을 구상하도록 하셨다. 결국 원기77년 12월23일에 일원의학회가 창립됐다. 발기회원으로 교무는 좌산 이광정, 장산 황직평, 교산 이성택, 은산 김장원이고, 교수는 박병렬(인서), 김상수(의균), 김재덕(재관), 백영석(정윤), 이건목 등 총 9인이었다.

다음 날 대산종사께서는 평소 염원하셨던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의 만남이 최초로 원광대병원에서 실시됐다는 보고와 아울러 양방과 한방의 협조진료 체제에 대한 회의를 했다는 보고를 법무실장으로부터 받으시고 '일원의학(一圓醫學)'이라 명명하셨고, 박인서, 이건묵, 김의균, 김재관, 백정윤, 손흥도, 전대희, 김학종, 김상익 등을 일원의학의 창립주로 내정하셨다.

원기83년 9월17일은 참으로 슬프고 가슴 아픈 날이었다. 김도연 교무(원광대학 산본병원)와 나는 수동식 인공호흡기로 대산종사님의 마지막 호흡을 도와드리고 있는 처지가 되었고, 결국 나는 호흡을 지탱하던 기관내삽관을 제거하게 됐다.

시방세계를 보시고 교단과 개인의 운명을 직접 주물러 짜시는 여래 부처님을 경험하였고, 무한히 크고 따뜻한 사랑을 받았던 나는 기쁘고 행복한 마음을 가슴에 안고, 모든 중생을 부처 만들기 위해 사셨던 위대한 스승의 뜻을 받들고 따르고자 다시 한 번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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