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결정적 계기

▲ 김경일 교무 / 원불교100년기념성업회
전무출신을 서원하고 원불교학과 1학년 서원관 생활은 고민의 연속이었다. 출가에 대한 회의(懷疑)라기보다 과연 나같은 하열한 근기가 이 공부를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자책감 때문이었다. 작심삼일, 마음을 다져먹고 수행일과표를 만들어 일주일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결심이 무너졌다. 며칠을 자책하고 자학하다가 다시 계획을 세우고 또 무너지고, 세우고 무너지고 하기를 일년내내 거듭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 한 구석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과연 전무출신이라는 이 길을 내가 갈 수 있을까. 내색은 못했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겨울 방학이 돌아오자 만사를 제치고 대산종사께서 주재하시는 계룡산 자락 삼동원으로 향했다.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딱히 따로 갈 곳이 없어 방황하다가 문득 떠오른 우연한 결심이었다.

법무실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방학을 지내던 중 어느날, 신년하례 손님이 뜸해지면서 나와 같은 처지의 학생들이 좀 더 가까이 스승님을 뵙고 문답할 수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내 인생에 결정적인 계기었다고 생각된다.

어느날 나는 대산종사께 "저는 크고 깊은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정성이 부족해서 며칠 지나면 작심삼일이 됩니다. 아무래도 저는 근기가 부족하여 어려울 것 같습니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대산종사께서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셨다.

"열 번을 넘어져도 열한 번째 일어나서 끝까지 가는 놈은 가는 놈이고 열 번을 잘 가다가도 열한 번째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놈은 못가는 놈이다."

순간 나는 마치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구나. 넘어지고 안 넘어지고가 문제가 아니구나. 넘어지면 그냥 일어나면 되는 것을…' 막혔던 길이 확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 그 숱한 자책과 자학으로 입은 상처들이 문득 다 치유되는 듯한 상쾌함이 있었다. 그런 뒤로 나는 방학만 되면 삼동원에서 지냈다.

'교리실천도해'를 직접 모시고 말씀 받드는 행운을 갖기도 했다. 방학마다 여행 한번 안가고 녹음한 법문을 녹취하고 수필하는 일을 하면서 지냈다. 그렇다고 나를 특별히 챙겨주시거나 사랑해주신 기억도 별로 없다. 그래도 지금까지 내 인생에 가장 뿌듯하고 행복한 기억은 대산종사와의 문답이었다.

말씀 말씀마다 어쩜 그렇게 내 심장 깊은 곳을 찌르는지… 머리털이 꼿꼿이 서는 느낌을 받았다. 언젠가 송대 야단법석에서는 서로 창자를 이을만한 스승과 제자 그리고 동지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내 말이 틀리면 훗날 내 무덤을 파서 따지라"고 하셨다.

또 "내가 할 수만 있다면 너희들 머리통을 열고 넣어주고 싶다'"고 하시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느 날은 산책을 하시면서 손을 꼭 잡고 "누구의 지도를 받느냐" 물으시고 또 하루는 "저 곳이 만성전(萬聖殿) 터"라고 말씀해주시기도 했다. "〈교전〉과 〈불조요경〉 외에 〈대학〉, 〈중용〉, 〈동경대전〉, 〈대순전경〉, 〈음부경〉, 〈도덕경〉, 〈신심명〉, 〈증도가〉 등을 봐야 한다"고도 말씀하셨다.

대산종사 탄생100주년을 앞두고 스승님의 법어와 성탑과 생가복원, 비닐하우스의 성자 다큐 제작, UR세미나 등 기념사업을 진행하면서 스승님의 크고 깊은 뜻을 전하는 큰 그릇이 되지 못함이 못내 송구하다. 그래도 대산종사와의 만남은 내 인생의 가장 으뜸가는 행운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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