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은 사랑의 기술

▲ 우세관 교무 / 강원교구 김화교당
불공은 원불교 신앙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불공하는 것과 신앙의 방법은 같은 뜻입니다.

원불교 신앙의 대상은 법신불 사은입니다. 한 제자가 소태산 대종사께 "일원상의 신앙은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일원상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사은이요, 사은의 내역을 말하자면 우주만유로서 천지만물 허공법계가 다 부처 아님이 없다"(대종경 교의품 4장)고 하십니다.

일원상은 우주 만유입니다. 우주만유는 천지만물 허공법계입니다.

천지만물은 '형상 있는 것'을 말하고, 허공법계는 '형상 없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우주만유는 형상 있는 것과 형상 없는 것을 모두 포함합니다.

다시 말해 천지만물을 비롯해 눈에 보이지 않는 허공법계까지 모두가 집약을 하면 사은이요, 더 하나로 축약을 하면 일원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원불교 신앙을 하는 사람의 불공 대상은 천지만물 허공법계 그 모두인 것입니다.

신앙의 혁명

교의품 15장에서 실상사 부처님을 찾아가는 노부부에게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그대들의 집에 있는 자부가 곧 산부처 입니다. 그대들에게 효도하고 불효할 직접 권능이 그 사람에게 있는 연고입니다" 하고 말씀하시지요.

성리품 29장에서는 원불교의 부처님을 묻는 시찰단에게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우리 집 부처님은 밖에 나가 있으니 잠시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점심때가 되어서 산업부원 일동이 농구를 메고 들에서 돌아오자 "저들이 다 우리 집 부처니라" 하고 말씀하시지요.

하나님과 부처님만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수하의 며느리와 농민인 산업부원도 신앙의 대상이라는 것을 실지로 예를 들어 보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저 하늘 멀리 있는 종적인 신앙의 대상을 횡적으로 평등하게 끌어 내리신 것입니다.

우주만유가 모두 법신불 아님이 없으므로 천지만물이 부처요, 며느리가 산부처요, 산업부원이 부처임을 법신불로 규정하셨습니다. 전 세계의 70억 인간을 비롯해 금수와 초목까지 각각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신앙과 전체신앙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는 '처처불상'은 신앙의 혁명입니다. 그래서 처처불상의 의미를 알아 '사사불공', 즉 매사에 불공을 하자는 것입니다.

불공의 방법

불공은 상대방을 살리는 것입니다.

불공하는 법이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사은 당처에 직접 올리는 '실지 불공'이요, 둘은 형상 없는 허공법계를 통하여 법신불께 올리는 '진리 불공'입니다.(교의품 16장)

'실지불공'은 주로 형상이 있는 천지만물에게 올리는 불공입니다. 다시 말해서 실지불공은 천지만물 당처 당처를 당해 그것을 '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아프리카에서는 굶어서 죽어가고, 중동에서는 전쟁으로 죽어가고, 우리 주변의 미물곤충은 환경의 파괴 때문에 죽어갑니다. 나의 국가라는 잣대로 다른 민족을 죽입니다. 나의 종교라는 잣대로 다른 종교인을 죽입니다. '나'라는 잣대를 버려야 합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미물 곤충과 초목까지도 연고 없이는 꺾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동포보은의 조목) 우리는 사람이라는 잣대로 환경을 파괴하고 금수와 초목을 죽이고 있습니다. 상아를 얻기 위해 코끼리를 죽이고, 핸드백을 얻기 위해 악어를 죽입니다. 일본에서는 입맛을 위해 고래를 죽이고, 종이를 얻기 위해 아마존과 인도네시아의 밀림을 죽입니다. 새만금의 갯벌도 죽어갑니다. '사람'이라는 잣대를 버려야 합니다.

이 모든 죽임의 잔치는 '실지불공'을 통해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물코처럼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불공'은 형상이 없는 허공법계에 올리는 불공인데요, '나를 바치는 것'입니다. 진리불공은 주로 심고와 기도로 올리는데 '무아(無我)'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목적은 나를 바치는 것이요, 무아가 되는 것입니다.

교단 창립기에 혈인 기도를 올릴 때 어떠했습니까?

"그대들이 사실로 인류 세계를 위한다고 할진대, 그대들의 몸이 죽어 없어지더라도 우리의 정법이 세상에 드러나서 모든 창생이 도덕의 구원만 받는다면 조금도 여한 없이 그 일을 실행 하겠는가" 하시니, 단원들이 일제히 "그러하겠습니다"고 대답하셨지요.

지극한 정성이라야 하늘이 감동을 합니다. 지극한 정성은 나를 바치는 것입니다. 무아(無我)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무아가 되어야 진리불공뿐만 아니라 실지불공도 극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실지불공과 진리불공을 종합해보면 결국 불공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살리고, 나를 바치는 것입니다. 불공(佛供)은 '지극한 정성으로 온 몸을 바쳐 모두를 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어느 때 어느 곳이든지 항상 경외심을 놓지 말고 존엄하신 부처님을 대하는 청정한 마음과 경건한 태도로 천만 사물에 응하라"(교의품 4장)고 하셨습니다.

자기불공이 바탕

마지막으로 정산 종사님의 법문을 상기해 봅니다.

"불공에는 자기불공과 상대불공이 있는 바, 이 두 가지가 쌍전하여야 하지마는 주종을 말하자면 자기불공이 근본이 되나니, 각자의 마음공부를 먼저 하는 것은 곧 불공하는 공식을 배우는 것이니라"(권도편 13장)고 하셨습니다.

정산 종사님은 '자기불공'이 근본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며, 자기불공은 '각자의 마음공부'라고 하셨습니다. 마음공부는 뭡니까? 삼학 수행을 말하지요. 수행이 철저해야 신앙이 잘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공부가 바탕이 되어야 상대불공이 잘 된다는 말이지요. 결국 자기 수행이 바탕이 되어야 상대불공도 잘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공법을 공부하면서 유념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자기불공인 마음공부를 철저히 해야 밖으로 향하는 불공도 잘 된다는 점입니다. 삼학공부를 통해 삼대력을 얻는 마음공부(자기불공)를 해가면서 상대불공인 진리불공과 실지불공을 잘하자는 것입니다.

결국 불공은 나와 모두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기술이자 묘약입니다.

불공(佛供)은
지극한 정성으로
온 몸을 바쳐
모두를 살리는 것입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