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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전 교무가 쓰는 선진읽기 9. 동산 이병은 종사
이도전 교무가 쓰는 선진읽기 9. 동산 이병은 종사
  • 이도전 교무
  • 승인 2013.04.19
  • 호수 16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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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없음에, 내 집 없음에

대의와 의리로 일관한 충(忠), 스승의 명은 한 말씀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신의로 일관한 효(孝), 담대하고 굵은 기국으로 동지들을 사랑한 애(愛)를 실천궁행한 동산 이병은(東山 李炳恩) 종사.

"내가 동산의 일생을 생각해보니 무아무불아(無我無不我) 무가무불가(無家無不家)로다. 그 큰 자리는 내가 없으므로 나 아님이 없으니 시방이 내 집이요, 출가위요, 성자의 대승행이로다" 열반을 앞둔 그에게 내린 대산종사의 법문이다.

어렵기만 했던 시절, 30대 중반 약업계에서 눈부신 사업역량을 발휘 하던 중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업계에서 교화계로 전환하는 기국이 큰 결정을 했다. 또한 인생 후반 20여 년은 대산종사를 보필했다. 바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내 일이요, 그 자리가 내 집이었다. 그의 일생은 소승법으로 철저히 수행하고 대승행으로써 봉공한 삶이었다.

원기25년 사촌형인 호산 이군일선진의 인도로 영산과원에서 불법연구회와 인연을 맺었다. 17세 되던 다음 해에 고산 이운권 종사의 연원으로 입회하여'병은'이란 법명을 받았다. 당시 영산지부장이던 정산종사의 안내로 보화당에서 근무를 했다.

그러나 일제의 징용을 피해 만주 등을 오가며 약거래를 하다 해방 후 보화당으로 복귀했다. 이러던 중 원기34년 유일학림 2기생으로 공부를 시작했으나 교단형편이 어려워지자 학업을 중단하고, 보화당에서 다시 근무를 했다.

그는 사업계에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35세의 나이에 교정원 재무부장에 선임 됐다. 재직시 총부 유지재단 확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뜻과 같이 되지 못한 아픔을 겪기도 했다.

부장직에서 물러나자, 대산종사는 하섬에 들어가 공부하기를 권유했다. 기도생활과 함께 〈정전〉,〈교리도해〉등을 공부했다. 마치 활화산 같았던 기질을 잠재우며 식망현진의 시간을 보낸 시기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20여 년을 대산종사와 파수공행하게 됐다. 이때 수려한 필체로 기록한 일기 형식의 대산종사 법설집은 후대에 길이 전할 기록물이 되었다.

그의 일생의 백미는 신도교당 교무, 삼동원장, 법무실장직을 수행한 18년간의 신도안 시절이다. 정산종사와 대산종사의 경륜을 받들어 삼동윤리의 정신을 실현하고자 피땀으로 가꾼 일터였다. 초창 당시 황량한 벌판이던 것을 8만평에 이르는 삼동윤리 실천 도량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1984년 정부시책에 따라 충남 벌곡 천호산 자락으로 이주하여 삼동윤리실천 대도량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일찍 찾아온 병마는 삼동원 법당 봉불을 앞둔 개화기에 58세를 일기로 열반의 길을 떠나는 아쉬움을 남겼다. '동산에 달이 뜨면 만국이 밝으리라(掛月東方萬國明)'라는 대종사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며 살다간 일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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