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도성 도무·원경고등학교
( 논설위원 )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혹 100주년이 흥겹고 즐거운 법의 잔치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해내야 하는 한시적인 교단의 짐이라고 생각하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 100주년에 맞추어서 집약적으로 사업을 추진하다보면 대개 '눈에 보이는' 성과물에 집착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가시적인 성과물은 대개 장엄으로 표현된다. 현재 영산성지 대각지 장엄으로부터, 대산종사 성탑 장엄, 대산종사 탄생지 장엄, 마음훈련원 건립, 그리고 서울회관 부지에 원불교 세계본부 건립 계획이 세워져 있는 걸로 안다. 그러나 한 교단에서 이 많은 일들을 짧은 기간 내에 다 해야 한다면 졸속의 위험성이 내포되어, 훗날의 후회를 불러올 수 있다.

지난 시기, 대종사 탄생 100주년 때와 정산종사 탄생 100주년 때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과연 행사를 지내고 나서 무엇이 달라졌고, 무엇이 교도들의 삶을 고양시켰는지, 알지 못하는 건 과문한 탓일까. 도리어 부실한 소태산 기념관이며, 대종사 컬러 진영 교체와 같은 아쉬운 기억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다.

종교 시설이나 성지 장엄 등, 우리 정신을 감동시키는 사업은 반드시 오랜 준비와 오랜 기간을 필요로 한다.

'오랜'이란 말은 '지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도리어 '깊은' 사색과 '너른' 공의와 '조급하지 않은' 평상심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업의 추진 과정은 정신의 성장과 같이 '오래 오래 계속'하는 수행의 과정이 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산성지 대각지를 새로 조성하는 것이나 대산종사 성탑 조성은 염려스러운 점이 많아 보인다. 대각지의 만고일월비를 없애고 새로 대각탑을 조성한다니! 나는 우선 이러한 몰역사적인 인식이 유감스럽다.

원기56년에 만고일월비를 처음 세울 때, 나중에라도 자금이 생기면 교체하기 위해 세웠던가. 그리고 건립 당시 교단이 영세하여, 버려진 비석을 주어다가 앞뒤를 깎아 세운 것이 그토록 부끄러운가. 나는 도리어 그런 역사가 소중하다. 그런 역사 속에 담긴 스토리가 아름답다. 별다른 꾸밈없이 중앙봉 아래 우뚝 솟은 만고일월비는 그 소박성으로 인하여 포근한 내 마음의 성지로 남아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40년 역사를 땅에 파묻고, 그 위에 막대한 자금을 들여 화려한 대각탑을 세우겠다니. 그게 무슨 장엄인가?

확정됐다고 하는 대산종사 성탑 설계안도 유감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합천 해인사에 있는 성철 스님 사리탑과 거의 똑같은 모양임을 알고도 확정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또한 설계안대로 조성될 경우, 당연히 대종사 성탑은 초라해질 수밖에 없고, 대종사, 정산종사 성탑과 아무런 연계성도 없는 어색하고 낯선 성탑의 공간이 자리 잡게 될 터이다.

무엇보다 나는 대산종사 성탑과 주변을 화려하게 장엄해야만 하는지 묻고 싶다. 그건 대산종사의 뜻이 아닐 것이다. '비닐하우스의 성자'로 추앙받았던 분의 사후 장엄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우리에게는 대로보다 오솔길이 필요하다. 넓은 잔디밭과 연못보다 조촐한 숲이 더 필요하다. 대종사 성탑과 정산종사 성탑 주변에 '소자, 소동, 소제'와 같이 미소 지으며 서 있는 '작은' 탑 하나를 원한다.

과연 장엄이 화려해야 장엄인가. 장엄하지 않고 장엄할 수는 없으며, 장엄을 최소화하여 최대치의 장엄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일까. 세상의 외관이 화려해지고 찬란해지는 물질 개벽의 시대에, 지극한 소박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진정한 장엄을 이루어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조촐한 둥근 옥을 아로새김'은 '병통'이다.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덜어내는 '도일손(道日損)'의 정신으로, 원불교100년성업이 도리어 빈자리와 여백을 많이 살려내는 지혜를 보여주면서, 표 나지 않고, 더디며, 재미없는, 무형의 근본 사업에 교단의 역량을 모았으면 한다. '100년까지'가 아니라 '100년부터'라는 마음이 더욱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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