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에 입교하여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의 기본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생각해 봅니다.

매주 일요 정례법회에 출석하여 설법을 듣고 조석심고를 빠지지 않고 올리고 보은헌공을 하고 입교연원을 하도록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각 법위등급에 맞게 계문을 받아 이를 철저히 지키도록 하는 일이라 봅니다.

대종사께서는 〈대종경〉 교의품 제25장에서 "사람이 혼자만 생활한다면 자행자지하여도 별 관계가 없을지 모르나 세상은 모든 법망(法網)이 정연히 벌여 있고 일반 사회가 고루 보고 있나니, 불의의 행동을 자행한다면 어느 곳을 향하여 설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기를 사람이 세상에 나서면 일동 일정을 조심하여 엷은 얼음 밟는 것 같이 하여야 인도에 탈선됨이 없을 것이며, 그러므로 공부인에게 계율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대종사께서는 "계문을 범하는 자는 곧 나를 멀리한 자요, 계문을 잘 지키는 사람은 곧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니 삼십계문을 특히 잘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정전〉 수행편 제6장 상시일기법에서도 계문의 범과 유무를 대조하여 기재토록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교당에서 법회에 참석해 보면 마음을 챙기는 공부나 인과를 믿고 은혜를 발견하여 감사생활하는 공부에 대해서는 강조를 하면서도 정작 직접적으로 죄와 복을 짓게 하는 계문을 지키는 공부에 대해서는 강조를 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에 따라 일반 교도들도 교당을 오래 다니고 마음공부를 한다고 하면서도 계문에 있어서는 이를 소홀히 여기는 경우가 많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일반 국가나 사회에서도 점점 법규를 지키는 것에 대해 엄격하고 법규를 지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길거리나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는 일이 흔한 일이었으나 이제는 각종 법규로 엄격하게 이를 규제하고 있고 이를 당연히 여기는 사회분위기입니다.

대종사께서 삼십계문을 정하시고 이를 받아 지키게 하신 뜻은 중생들이 계문을 범과하게 되면 죄업을 짓게 되어 고통속에 살아가게 되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자비방편으로 베푸신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계문이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계문이 구속스럽고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은혜롭고 소중하게 생각되어 더욱 철저히 지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원남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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