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사회 실현은 실행문제

▲ 황경식 교수.
원광대학교에서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글로벌인문학'강좌를 진행해 대학생들의 인문학적 소양을 함양하고 있다. 1일 원광대 법학전문대학원 5층 컨퍼런스룸에서 '공정과 정의사회'란 주제로 황경식 서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가 특강을 진행했다.

정의란 무엇인가?

M. Sandel의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책이 한국의 독서계를 마치 쓰나미처럼 훑고 지나갔다. 출간된지 몇 개월 되지도 않아 한국판매 1백5십만부를 넘겼다니 저자마저도 놀란 한국적신드롬이라 할만하다. 진정 한국사회가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이다지도 심각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샌델의 정의론은 한국사회가 정의사회로 변화하는데 있어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는 천재일우의 기회라 할만하다.

그러나 이같은 야단법석은 내공이 부족한 우리 지성계의 지적 천박성을 보이는 징표로 해석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으니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닌듯 싶다. 하버드대학이라는 미국의 명문대 명강사이고 보면 샌델의 정의론이 마치 명품 구매와도 같은 지적 허영에 그치는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논리 논술에 행여 도움이 될까 싶어 많은 수험생들이 구매했다면 그것도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안도감이 위안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것은 그 뒤에 우리 한국 지성계에서의 팔로우업(follow up )이 부족했다. 이미 샌델은 우리 기억에 잊혀졌다. 이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우리 지성계가 계속 팔로우를 해나가고 정말 마이클 샌델이 우리 한국사회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깊게 한번 성찰할 수 있는 단계에 들어서야 하는데 이미 잊혀져가고 있는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 한국사회는 부정의한 사회다. 앞으로 정의로운 사회로 나가려면 지금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정의 이론이 아니다. 정의 이론을 몰라서 부정의에 타협하는가? 정의가 무엇이고 불의가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는 삼척동자도 다 안다. 지금 우리는 정의에 대해서 아는 만큼이라도 행동에 옮겨야 하는 단계에 있다. 그런데 아는 만큼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정의에 대해 아는 바를 행동에 옮기는 도덕적 용기, 정의의 덕을 익히는 것이 급선무이다.

인생이란 불공정한 경기

우리가 사는 인생도 하나의 게임이다. 우리의 인생을 100m 경주에 비유해보자. 인생이란 100m 경주는 매우 불평등한 경주이다. 열심히 달리고 있지만 그야말로 불평등한 경주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경주에서 모두 원점에 동시에 출발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원점의 가까이에서 출발하기는 하나 일부는 50m 전방에서 출발하는가 하면 소수의 사람은 90m 혹은 95m 전방에서 출발하기도 한다. 그리고 인생의 경주는 달리는 능력이 천차만별이다. 아주 스피드하게 인생을 잘 나가는 사람도 있지만 평생을 달려도 골인지점에 도착할 수 없는 장애우들도 있다. 나는 이것을 인생이라는 경기에 있어서 원천적인 불평등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이 원천적인 불평등을 정의롭다 부정의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자연적 사실이다. '정의롭다 정의롭지 않다'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그와 같은 주어진 불평등한 사실을 사회제도를 통해서 얼마만큼 수정하고 시정하고 인간적으로 조정하느냐에 '정의롭다 정의롭지 않다'는 말을 붙일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태어나는 가는 운에 달렸다. 한국사회가 운이 얼마나 지배하는 사회인가에 따라서 정의 여부가 결정된다. 한국은 복불복의 사회이며 운이 전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이다. 운의 지분을 축소시키면 그만큼 우리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로 가까이 갈 수 있다.

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연적 운(타고난 운)이다. 예를들면 우리의 지능은 운이다. IQ가 150으로 타고난 사람도 있고 IQ가 100도 안되게 태어난 사람도 있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책임이 없기 때문에 운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 운(사회적 지위)이다. 단순화 시켜서 말하면 재벌 2세로 태어나느냐 거지 2세로 태어나느냐는 운이다. 그래서 한국사회가 개인의 운에 대해서 어떻게 개입해서 그것을 수정하고 보상하고 조정해 주느냐에 따라서 우리 사회의 정의 여부가 결정된다. 현 정부가 어떻게 우리 운에 개입하는 가에 따라서 현 정부의 정의 여부에 대해서 평가 할 수 있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란 말이 있다. 인생의 성공은 운이 70%고, 자기 능력이 30%라는 뜻이다. 나는 운칠기삼을 반대한다. 능력도 운이다. IQ를 잘 타고 나는 것, 중산층 가정에서 좋은 교육을 받는 것은 운이다. 기삼(技三)도 그 속에 운이 많이 들어있다. 나는 운칠기삼을 수정해서 인생의 성공은 91%가 운이고, 9%가 능력이라고 바꾸고 싶다. 우리가 그 운명에 순종하며 살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운이 얼마인지 알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노력할 수밖에 없다. 열심히 노력하고 운명을 기다리는 것이 맞다. 젊음이들은 너무 운명론적이고 숙명론적일 필요는 없다. 타고난 운이 부족하면 열심히 운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기회균등과 공정사회

과거 우리는 미국이 기회의 땅이라 하여 아메리칸드림을 시발했음을 알고 있다. 미국은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능력, 성취 성과가 성공을 보장하는 나라로 간주됐고 가난한 자도 부자될 수 있고 하층민도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됐다. 미국은 그야말로 기회의 땅이었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나라가 미국이었다. 그래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한국인들이 많이 있다. 하원의원도 되고 시장도 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기회균등 공정한 사회는 정의사회의 반쪽밖에 되지 않는다. 공정한 사회는 사회적 운에 대해서 약간의 교정을 하는 것이다. 공정한 사회는 내 부모가 어떻든 내가 중산층의 자식이든 하층민의 자식이든 어느 정도의 살만한 복지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자신의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공교육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공정한 사회로 가는 중요한 잣대인 공교육이 제대로 역할하지 못하고 있다. 공교육이 죽었다. 공교육이 파행으로 치닫고 있다. 한국사회는 우리에게 기회균등을 보장할 수 있는 공교육마저 힘을 못쓰고 있다.

기회균등은 사실상 인간의 인격이 갖는 평등한 가치보다는 사회적 게임에 있어 각자가 지닌 경쟁력을 최우선 기준으로 선별하는 원리이다. 이로 인해 경쟁력이 없는 자는 소외되기 마련이며 사회적 불평등에 증대할 우려가 있다. 원천적 불평등에 대해서 미약한 대처라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남녀차별의 관행이 사회 곳곳에 잔존하고 있을 경우 "여성들이여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세요. 남녀는 평등합니다"라는 선언은 무의미한 평등주의에 불과할 뿐이다. 진정한 평등사회를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차별시정조치(역차별)가 매우 필요하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복지사회가 바로 사회적 운을 약화시키고 완화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쓰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의 복지수준은 사회적 운을 경감시키기에는 너무 미약하다. 사회적 운을 약화시키고 경감시킬 수 있는 정의로운 정책이 아직 우리사회는 유명무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자연적 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기본적으로 가정이 있으면 이 격차를 없앨 수가 없다. 부모에 의해서 자식이 태어나기 때문에 가정이 있는 한 IQ는 되물림하게 된다. 가정으로 인해서 많은 부정행위가 이뤄진다. 공직자들의 부정행위도 가장 큰 이유도 가정 때문이다.

자연적 운이건 사회적 운이건 간에 운의 지배를 그대로 방치하고서는 정의와 관련해서 우리는 어떠한 합의도 이르기 어렵다. 이를테면 재벌 2세와 거지 2세간에는 어떤 합의점에 이를 수 있을까? 재벌 2세는 가능한 기득권을 챙기려 안간힘을 쓸 것이며 쪽박밖에 깨질 것이 없는 거지 2세는 나름의 배짱을 부리게 될 것이다.

결국 어떤 합의도 결렬될 것임이 명약관화하다. 실질적 합의를 위해서는 일정한 형태의 자연적· 사회적 운을 괄호치는 무지의 베일이 불가피한 것이다. 현대사회는 다원주의 사회이다. 다원주의 사회라는 것은 가치관이 천차만별한 사회이다. 자기 가치관을 갖추려고 하면 우리는 어떤 합의도 끌어낼 수 없다. 우리가 당대인을 위해서 모든 자원을 다 써버리고 고갈시킨다면 차세대는 쓸 것이 없다. 이처럼 정의는 세대간의 문제와도 연관있다.

운의 중립화와 정의사회

우리의 타고난 운을 중립화하고 완화하는 것이 바로 정의다. 운의 평준화를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에서 도달하고자 했던 공정사회의 시장질서하에서는 운과 복이 지배할 여지가 남아있다. 시장의 진입장벽이 높기 때문에 시장에 진입할 수 없는 많은 사람이 있다. 운이 없는 사람,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너무 많다. 입학과 취업에서 우리는 공정한 경쟁을 요구한다. 그러나 세무나 복지는 공정을 부치지 않고 공평한 세무행정 공평한 복지라고 한다. 공정은 공적 정당성 내지 공적 올바름을 의미한다면 공평은 형평 내지 공적 평등을 가리킨다 할 것이다. 공정은 자칫 형식적인 평등에 그칠 우려가 있으며, 공평은 실질적 평등에의 요구로 기울 가능성이 있다. 공정은 절차주의적 정의라면 공평은 결과주의적 보완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주장하는 정의로운 사회는 공정한 사회와 공평한 사회를 아우르는 사회이다. 절차주의적 정의를 만족시키는 공정한 사회와 최소수혜자(가장 운이 없는 사람)를 위시한 모든 사람의 복지를 염두에 두는 결과주의적 정의가 결합된 공평사회를 말한다. 자기의 책임이 아니고 우리 사회에서 천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 가장 운이 없는 사람, 가장 복을 덜 타고 난 사람에 대해서 배려하는 생각이 없다면 우리의 정의론은 공허한 정의론이다. 정의로운 사회의 현실적 실현은 위해서는 사회구조개혁을 해야 한다. 지금 새정권이 열심히 입법도하고 사회구조를 개혁하고 있다. 현실사회 구조개혁을 통해서 정말 정의로운 사회가 새정권을 거치면서 한발자국 더 다가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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