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은 우리 '갑부네'마을 지켜주는 수호신"
아버지가 한옥 대목수
어깨너머로 배워

▲ 그의 첫 작품인 코 장승. 코가 유난히 도드라져 있다.
▲ 신승식씨가 자신이 처음 만든 장승 앞에 서 있다.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오롯한 들길을 지나다보니 장승 한 쌍이 눈에 띈다. 입을 크게 열고 호탕하게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 앞에는 '갑부네'라는 마을석이 서 있다.

유난히 한적한 마을길을 따라가니 긴 머리를 뒤로 단단히 묶은 신승식(59)씨가 장승과 같이 서 있다. 장승을 제작 할 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는 것인가. 마을 어귀에서 본 장승과 닮은 모습이다.

최근 작업을 시작했다는 장승을 보여줬다. 이마저도 닮은 것 같다. 그는 장승 제작을 시작한 계기에 대해 "어느 날 길을 지나가는 데 장승이 보였다. 나도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년 전 취미로 시작했다"며 "누구라도 태어날 때부터 연장들고 태어나지 않았다"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누구나 있을 법한 거창한 '계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냥 하고 싶어 장승 제작을 해 봤다는 것이다. 하지만 솜씨가 나쁘지 않다. 정성이 많이 들어간 모양새다.

첫 작품은 장승제를 지내는 공간인 집 앞 공터에 서 있는 '코 장승'이다. 얼굴에 비해 코가 유난히 크다. 코에 포인트를 줬다고 전한다.

그는 "코 장승은 유난히 아끼는 장승이다.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제작해 고생을 많이 했지만 애정이 간다. 처음 작업을 할 때 나무의 성질에 대해 전혀 몰랐다. 아카시아나무로 만들게 된 이유이다. 반년 정도를 죽을 힘을 다해 만들었다"며 인상을 지었다.

일반적으로 장승 제작에는 소나무를 쓴다. 연장을 잘 받아 편하기 때문이다. 아카시아나무는 나뭇결이 강해 조금만 실수하면 결이 찢어진다.

그는 "그냥 해보고 싶어서 장승을 만들었다. 당시 눈과 코 등을 어떻게 표현할지도 전혀 몰랐다. 귓동냥도 많이하고, 사진도 많이 참고 했다. 연장도 갖춰지지 않아 기계톱, 끌, 망치 등 몇 가지만 놓고 작업을 했다"며 "현재는 전동톱, 핸드 글라인더, 조각도 등 많이 구비했다. 요령도 생겨 조금 능숙해졌다. 보통 작업 기간을 3개월에서 1년 정도 잡는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집안 내력을 이야기 하며, 그의 부친(신종래)이 목수였다는 사실을 넌지시 전한다.

그는 "우리 아버지는 한옥 대목수로 동네에서 나름데로 유명했다. 아버지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며 "하지만 직접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어깨너머로 배웠다. 아무래도 피는 못 속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장승 제작을 하는 그의 마음이 담겨 있음을 알수 있다. 장승에는 정성과 혼을 담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위한 작품 구상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그는 "제일 처음 나무 모양을 살펴본다. 구상하는 시간이 제일 오래 걸린다. 나무의 모양대로 해야 한다"며 "마을 입구에 있는 장승도 나무가 살짝 휘어져 있어 박장대소하는 장승을 만들었다. 사람이 목을 뒤로 젖히며 경쾌하게 웃는 모습이 상상 됐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장승 작품의 특징은 코, 눈, 입 중 하나만 포인트를 잡는다. 눈 장승은 눈을 부리부리하게 만들고, 코 장승은 코를 크게 만들고, 입 장승은 이빨을 강조한다.

그는 "상상만으로 작업하다보니 디자인이 자꾸 변한다. 표정도 수십 번도 더 바뀐다. 그림 그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뀔 수밖에 없다"며 "작업하다 연장을 깊이 들어가면 그대로 맞춰야 하기 때문에 그 순간에도 디자인이 바뀐다"고 호탕하게 웃었다.

윤곽을 잡은 후 나무 모양에 따라 찡그리는 장승, 웃는 장승, 무서운 표정을 하는 장승의 표정을 잡는다. 글씨를 쓰기 위한 몸통 작업을 할때도 자연스러움을 발휘한다.
▲ 현재 작업 중인 장승. 100여 년된 관송으로 아직도 송진이 흐른다.

이것은 매일 장승 만드는 데만 얽매이지 않는 그의 성격도 한 몫한다. 시간 날 때마다 작업을 하는 것도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는 "작업을 하다보면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연장을 놓는다. 잠을 자다가, 논일을 하다가, 길을 걷다 갑자기 생각이 떠오르면 다시 시작해 날 새는 줄도 모르고 통나무만 붙잡고 있다"며 "머리로 그림이 떠올랐을 때 작업을 해야지 하며 다시 생각하려면 잃어 버린다"고 말했다. 이것은 부부싸움의 계기도 됐다.

그의 아내 서말순(56)씨는 "농사를 해야 먹고 사는데 밤낮없이 붙들고 있으니 화가 난다. 난 마당에 꽃도 가꾸고 싶은데, 죄다 통나무만 서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안해주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니 싫다"고 역정을 냈다.

그는 "보통 남자의 취미가 깊어지면 가족들은 싫어하기 마련이다. 일 안하고 매일 통나무만 잡고 있다고 혼난다. 그래도 난 편백나무로 나무 의자도 만들어주고, 그네도 만들어 줬다"며 "내 역할 다 했기 때문에 핀잔주지 말라"고 아내를 향해 손짓했다.

인터뷰 중 동네 사람들이 하나씩 모여들었다. 그의 집은 동네 사랑방이었다. 들일을 하다 들러 약주 한잔씩 하며 잠시 쉬어가는 장소이기도 했다.

대문을 들어서던 고만길 씨는 '왜 왔어? 나 잡아가러 왔나?'라며 농담부터 던진다. 그렇게 동네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어느덧 다섯명이다.

신 씨는 "이 사람들과 매년 장승제를 준비한다. 날짜는 음력으로 1월14일 대보름 전날로 올해 3회 째다. 첫 장승제에 100명 정도 모였고, 작년에는 50여 명이 모였다"며 "장승제를 하게 된 계기는 '장승을 만들어서'이다. 이것을 동네잔치로 발전시킨 것이다. 주소록을 만들어 일일이 전화로 장승제를 알린다"고 설명했다.

1970년대 '갑부네' 마을은 30호가 넘을 정도로 작지 않은 마을이었다. 장승제를 하는 날은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간 동네 주민들과 그의 후손을 다시 불러들여 함께 어울리는 '만남의 날'인 것이다.

장승의 의미는 여럿이다. 마을 어귀에 세워 놓고, 액운을 막아주고 동네 안녕을 위한 역할과 마을 간의 경계의 역할을 했다. 그의 설명처럼 '갑부네' 마을에서는 장승이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주는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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