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낙원(實樂園) 건설 방법

▲ 우세관 교무/
강원교구 김화교당
절집에 '반농반선(半農半禪)'이란 말이 있습니다. 원불교에도 반농반선과 같은 말이 있는데 바로 '영육쌍전(靈肉雙全)'입니다.

영육쌍전은 원불교의 특징

원기 78년(1993) 수계농원에서 산책을 마치신 대산 종사님께서 불단 참배를 하시며 지팡이로 한 문구를 가리키시며, 고치라고 명하십니다. 불단위에는 '천일기도', 왼쪽에는 '반농반선', 오른쪽에는 '활불도량'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대산종사님께서 고치라고 명하신 것은 "왼쪽에 쓰인 반농반선을 전농전선(全農全禪)으로 바꾸라" 였습니다. 반반이 아니라 일과 공부를 둘로 보지 않고 오롯이 하나가 되어 전념하라는 것입니다. 대종사님의 영육쌍전법을 원만하게 드러내신 것이지요.

영육쌍전은 바로 전농전선(全農全禪)의 의미입니다. 대부분의 종교가 헌금에 의지하고, 그 헌금의 대부분을 공익보다는 종교인의 인건비나 장엄에 쓰지요. 하지만 원불교의 경우 영육쌍전 법문에 의해 출가도 생산성을 높이고, 영적 도덕성을 공익사업으로 실현해 갑니다.

영육쌍전법은 원불교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법문입니다.

영육쌍전은 완전한 생활의 지침

눈에 보이지 않는 나를 '영(靈)'이라 하고, 눈에 보이는 나를 '육(肉)'이라 합니다. 영은 정신, 육은 육신을 말하지요. 따라서 어느 한 방면에 치우치지 말고 정신과 육신 모든 방면에 완전한 생활을 해가자는 것이 바로 영육쌍전이자 진리적 생활입니다.

우리의 삼학은 2가지가 있는데요, 정신의 삼학과 육신의 삼학입니다. 정신의 삼학은 '정신수양·사리연구·작업취사'를 말하고, 육신의 삼학은 '의식주', 다시 말해 물질이나 재화를 뜻하지요. '정신의 삼학'은 '육신의 삼학'을 올바르고 지혜롭게 구하기 위한 것이지 깨달음을 얻어 거기에 안주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아울러 '육신의 삼학'인 의식주만을 구하는 것은 물질만능의 물결에 휩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의 삼학과 육신의 삼학으로 완전한 생활을 해가자는 것이 영육쌍전법 입니다.

완전한 생활이란 '진리적인 삶'을 말합니다. 진리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진리와 삼학(수행)으로 의식주(즉 물질)를 구하고, 의식주(물질)와 삼학(수행)으로 진리를 구하여 나와 사회를 발전시키자는 것입니다. 완전한 생활, 완전한 세상으로 말입니다.

영육쌍전은 종교개혁

원불교는 생활불교입니다. 다시 말해 불법의 시대화·생활화·대중화를 기치로 일어난 종교입니다. 따라서 수도에 전념한다 하여 생활의 의식주는 등한히 하거나 타력에 의존하는 기존의 폐풍을 개혁한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영육쌍전법은 기존 종교에 대한 일대 개혁을 의미합니다. 영육쌍전이 내포하는 대종사님의 '종교개혁' 의미를 되새기는 삶이 이 법문을 체 받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 첫째는 영적 수련에 치중하는 성직자들에 대한 충고입니다. 누군가에게 빌붙어서 빚지는 삶을 살지 말자는 겁니다. 정신의 삼학은 '수행'입니다. 수행은 '자신을 잘 다스리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것은 완전한 사람, 진리적인 사람이 되자는 것이지요. 수행하는 것에 머무르면 안됩니다. 평생을 토굴속에서 깨달음을 얻는다고 다리 틀고, 고급스런 언어를 써가며 설교를 하다가 생을 마감한다면 그것같이 허망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요? 빚만 지다 가는 겁니다. 종교의 가르침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라는 틀에 안주하여 껍데기로 존경받다가 허망하게 빚만 지고 가는 거지요. 대종사님께서는 새 시대의 종교에 대해 정신적인 수행과 더불어 현실적인 직업과 노동을 강조하셨습니다.

둘째는 일반인들에 대한 충고입니다. 돈으로 다 되는 세상(자본주의)이라고 해서 돈만 좇고 돈만 모으다가 인생을 다 보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육신의 삼학인 의식주는 물질입니다. 한마디로 돈이지요. 이 물질은 의미 있게 써야지요.

평생을 좋은 옷 사고, 좋은 먹거리 좇고, 집을 넓히다가 어느 순간에 가버리면 그건 또 얼마나 허망합니까? 평생 번 것 가운데 무덤에 단 하나라도 가지고 갈 수 있나요? 이 세상에 그것 조금 모으려고 왔나요? 인과를 알았더라면 조금이라도 나눴을 것이고, 영생을 알았더라면 이생의 삶에 급급하지 않고 내생을 규모 있게 준비했을 텐데 말입니다. 물질 모으는데 정신을 쏟고 영적인 성찰을 하지 않으면 죽음이라는 것이 두려움으로 다가오지요. 이처럼 영과 육 가운데 하나에 치우치면 참 허망한 결과가 오지요? 하지만 완전한 생활은 가능합니다.

마지막으로 진리에 합일하는 방법인데요, 영육을 쌍전하는 일상의 방법입니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새벽 공기를 마셔보세요. 천지기운과 하나가 된다는 느낌을 받을 겁니다. 그때 허공법계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해봅시다. 진리와 하나된 순간에는 거짓도 망설임도 없이 나의 고백이 술술 나옵니다. 그리고 좌선으로 안정시키고 나를 점점 큰 산으로 만들어 갑시다. 내가 좋으면 조금 서둘러 가족 모두도 챙겨봅니다. 내가 바뀌면 가족이 바뀝니다. 내가 아침형 인간이 되면 자녀들도 평생 아침형 인간으로 변합니다.

일터에 가서 일심으로, 그리고 감사생활로 신바람 나게 생활합니다. 퇴근할 때는 끊을 것 끊어 보기도 합니다. 술자리도 손사래쳐 보고, 인터넷도 덮어보고, 고스톱 자리도 웃어 넘겨보고 집으로 돌아와 봅니다. TV도 잠시 밀쳐 봅니다. 먼지 쌓인 목탁을 꺼내보고, 염주도 돌리면서 염불과 독경으로 흩어졌던 마음을 하나로 다잡아 봅니다. 사이버교당에서 법문 사경을 하던지, 노트를 꺼내 한 장씩 사경도 해봅니다. 그리고 9시 반이 되면 자녀들과 가족 모두를 위해, 그리고 시끄러운 세상을 위해 저녁심고를 올려봅니다. 그리고 아직 한 번도 그렇게 해본 적 없겠지만 잠자리에 일찍 들어갑니다.

이런 하루가 어리석고, 세상과 고립되는 것 같지만 자신의 영성을 점차 키워갑니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건강해집니다. 삶도 더욱 편안해 집니다. 진리적으로 사니 의식주라는 물질을 구하는 일이 더 쉬워질 겁니다. 그럼 그 물질을 더욱 진리적으로 쓸 수 있지요. 진리와 합일하는 완전한 삶은 가능합니다. 영육쌍전에 대한 이해와 유념을 한다면 더욱 가깝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영육쌍전은 '실낙원(實樂園) 건설'을 의미합니다. '현실낙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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