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방언공사의 주역

대종사의 첫 제자로 방언공사와 법인기도로 새 회상 창립의 혈심 주인이 된 팔산 김광선 대봉도의 장자. 당당한 풍모에 의기와 신성으로 교단의 대의를 세우며, 무아봉공 사무여한의 전무출신 정신의 사표가 된 형산 김홍철(亨山 金洪哲, 1902~1987) 종사.

그는 어려서부터 활달한 성격으로 의기양양하게 자라며 강직한 성품을 간직했다. 이런 성격은 훗날 교단의식의 마지막 만세삼창을 도맡았으며, 때로는 창과 춤으로 대중의 법열을 흥기 시켰다. 소년시절 대종사께서 "천지공사인 방언공사에 합력하라"는 말씀을 받들어 두 맘 없이 조력하며 회상창립에 동참했다.

원기4년 아버지는 그에게 가사를 맡기고 출가의 길로 나섰다. 이후 10여년을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가정경제를 일으키는데 골몰했다. 원기9년에는 온타원 이보응화 정사와 대종사의 주례로 영산교당에서 원불교 예법에 따라 제1호로 결혼식을 올렸다.

원기15년, 숙겁의 인연으로 만난회상과 대종사와의 두터운 법연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전무출신의 길로 인도했다. 농업부 감원으로 전무출신의 첫 발을 내딛었다. 초창기 어려운 살림과 주경야독의 고된 생활이었지만 대종사의 지도하심은 고된 하루를 잊게 했다. 이렇게 2년을 지내자 농업부장을 맡겼다. 당시 농업부는 3년간의 수해로 흉년이 들어 큰 빚을 지고 있었다. 이런 천신만고를 이겨내며 빚을 다 갚는 능력을 보였다.

원기20년에는 신흥교당 초대교무로 부임했다. 신흥은 처가마을이었다. 일제하의 어려움과 처족이 있는 곳에서의 교화는 어려운 문제였다.

그는 '잘 사는 마을, 부지런한 마을, 근검절약하는 마을, 화목 단결하는 마을, 상부상조하는 마을'이란 목표 아래 새 생활 운동을 전개하며 정신을 일깨웠다. 온 마을이 일치단결하여 새 생활운동을 한 결과 농촌진흥운동 우수마을로 선정되어 표창을 받았다. 원기32년 신흥교당과 이웃한 이흥과원으로 일터를 옮겼다. 이때 6·25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공동생활을 이어가며 김근수, 김장권, 이선우, 김정관, 이선경, 김성현 등 많은 소중한 인연들이 전무출신을 하도록 인도했다.

원기40년에 총부 순교감으로 부임했다. 교당 순회도 하고, 내생준비도 하며, 공부할 기회라 생각했다. 그러나 영산 재 방언공사가 시작되자 정산종사는 그에게 총책임을 맡겼다. 정산종사는'사무여한(死無餘恨)'이란 법문을 써주시며 "천난 만난을 당해도 그 곳에서 죽어 돌아오지 말라"하셨다.

그야말로 그는 '구인선진 재차흥기(九人先進 再次興起)'라는 기치 아래 사무여한의 정신을 재현했다. 드디어 원기43년 정관평 재 방언공사를 성공리에 마무리했다.

원기49년 원광사 사장에 이어 원기55년 총부 예감의 임무를 수행했다. 원기63년에 총부 교령으로 추대되어 송대에서 수행에 전념하며 일생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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