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관명 교무/맨하탄교당

화창한 오후, 뉴욕 맨하탄 중심에 있는 센트럴파크에는 책 한권, 물 한 병을 든 뉴요커와 가족들이 모여 든다. 나무 그늘 밑에서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아버지와 비키니로 일광욕을 즐기는 아가씨들 모두 자신이 공원을 소유한 듯 자유롭다. 이런 풍경이 내게 낯설게 보이는 것은 서로 경쟁하듯 먹을거리, 마실거리, 놀거리를 트렁크에 가득실고 공원에 와서 먹고 마시고 놀다가 지쳐 돌아가는 사람들과 남겨진 음식 쓰레기 가득찬 한국 공원과는 사뭇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쾌적한 공원에서 온전히 휴식을 즐기는 뉴요커들의 합리적인 모습에 부러움을 느꼈다.

미국 근무 4년 동안 느낀 미국의 강점은 합리적 사고다. 거리의 간판은 10년은 된듯한 간판이 수리해서 쓰여 지고, 학생들의 옷차림은 그야말로 수수하다. 형식보다 본래 목적에 철저한 모습은 미국에 부는 불교 바람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현재 미국에 불자는 200~300만으로 추정되며, 1000만 명 이상의 명상인구가 있다고 한다. 이들은 유일신앙의 한계는 느끼고 개종하거나, 전통신앙을 지키면서 불교를 배우는 상류지식층 백인이 많다. 이들은 먼저 책을 통해 정보를 얻고, 인터넷으로 확인한 뒤, 쇼핑하듯 여러 사찰을 체험한다. 그리고 철저하게 비교, 선택한다.

 그래서 미국불교는 재가수행자 중심에 양성평등, 사회참여, 과학과 의학 그리고 심리학 영역에 활용하는 실용주의적 특징을 보인다. 미국인불자들은 미국문화에 동화되지 못하고 민족공동체, 기복신앙, 출가중심의 본토 문화를 고수하는 아시아 불교를 '이삿짐 불교'(Baggage Buddhism)라 부른다. 그것은 미국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육지에 떠 있는 섬과 같이 고립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원불교는 이삿짐을 풀었는가? 나는 회의적이다. 왜냐면 미국에 있는 교당의 현관 안쪽은 여전히 한국이기 때문이다.

원불교는 무엇을 위해 미국에 왔는가? 미국인에게 한국 원불교의 문화를 알리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닐 것이다. 미국을 위한, 미국인에 의한 미국의 소태산이 탄생해야 한다. 여기에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첫째는 미국인이 혼자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교전과 교리해설서, 둘째는 미국인의 삶을 사는 교역자, 셋째는 교화할 수 있는 장소이다. 여기에 우선 순위는 당연히 교법, 인재, 건물 순이 될 것이다. 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우리의 교법으로 하나씩 해결해 감으로써 원불교의 세계화는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대로는 미국에 부는 불교바람이 우리를 비껴갈 것이고, 다시 이삿짐을 싸야 할지 모른다.

나는 높은뜻연합선교회 김동호 목사의 '별난 포도원 주인'이야기 속에서 대종사를 만났다. 이 포도원 주인은 아침, 점심, 저녁에 장에 나가서 일꾼을 구한다. 심지어 일을 마치기 직전까지 일꾼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같은 임금을 준다. 왜 포도원 주인은 이처럼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경영을 했을까? 주인은 포도원을 위해 일꾼을 구한 것이 아니라, 일꾼을 살리기 위해 포도원을 경영한 것이다. 일자리를 기대할 수 없는 오후 장터에 서 있는 일꾼의 절박함을 알고 그를 위해 일자리를 주는 주인의 마음이 대종사님의 마음이 아닐까? 김목사의 교회경영 소식은 더 큰 감동을 주었다. 학교강당을 빌려 예배를 보면서 200억의 건축기금을 어려운 이들을 위한 학교, 병원, 일자리를 세웠다. 더 이상 신도를 수용할 강당을 구하지 못해 교회를 4개로 분리하면서도 교회건축보다 약자를 위한 사회사업에 헌신하는 모습에서 구인선진의 '창생구제' 염원을 떠올린다.

원불교가 한국의 4대종교라고 세계 속에 4대 종교는 아니다.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몇 만 명 모이는 기념식과 번듯한 훈련원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마을 가운데 '섬'이 되어가는 교당을 살려야 한다. 그 방법은 시대의 아픔과 함께하는 소태산 마음공부의 실현이다. 주말에는 교전과 맑은 물 한병 들고 한적한 공원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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