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도성 도무·원경고등학교(논설위원 )
'팔꿈치 사회'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독일에서 온 말로 옆 사람을 팔꿈치로 치면서 앞만 보고 달리는 경쟁 사회를 적절하게 비유한 말인데, 고려대 강수돌 교수가 책 제목으로 사용하면서 알려졌다. 이 경쟁적 사회 구조는 소수의 성공을 위해 다수가 희생하는 구조로써, 꽃다운 학생들이 성적비관으로 아파트에서 몸을 던지게 하고, 정리해고로 내몰린 노동자들이 고공 농성을 벌이며, 살아남은 노동자들은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으로 산업재해와 삶의 질 하락에 시달리게 한다.

2,30년 전까지만 해도 소위 '20대 80 사회'라고 하던 양극화가 '10대 90 사회'로, 이제는 아예 '1대 99 사회'로 진행되는 것은 이 경쟁 사회가 가진 치명적인 부작용이다. 승자독식사회라는 말은 이러한 '팔꿈치 사회'를 표현한 다른 말일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행복은 먼 이야기다. 그야말로 '생존경쟁이 도리어 생존을 위협하는 이러한 상황은 전체 자살률 1위에다 그 중 20대 여성 자살률 OECD 평균의 두 배, 어린이와 청소년 행복지수 OECD 23개국 가운데 꼴찌, 50대 여성의 행복지수 세계 최하위, 한국 학생들의 '사회적 상호작용 역량 지표' 0.31점으로 35개 조사국 가운데 꼴찌가 되게 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가 불평등 사회임을 나타내 주는 이런 지표들은 경쟁사회를 협동사회, 균등사회로 방향을 전환하지 않으면 전 세계에 핸드폰을 아무리 팔아도, 자동차를 아무리 수출해도 해소될 수 없는 것이다.

대종사의 교법이 이 지점에서 진실로 훌륭한 약방문이 될 것임은 바로 은혜와 상생의 관계, 협동과 균등의 관계를 설파하셨기 때문이다. 아니 무릇 모든 종교들은 약육강식의 경쟁 논리를 거부하며, 호혜와 균등을 주장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100년 전의 어두운 상황 속에서 불교뿐 아니라 종교 자체를 혁신하고 새 시대를 열어젖힌 원불교가 100년이 지난 지금은 도무지 사회의 빛이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 안타깝다. 어둠이 깊으면 빛이 더욱 밝은 법인데 우리는 어둠 속에 숨어서 세상의 빛이 되기를 주저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난 30년 교화 정체의 원인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원불교의 '사회적 상호작용 역량'을 거의 개발하지 못한 데에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100년도 안 된 신흥 종교라서 교단 내적인 성장을 위해 사회 참여를 유보했다는 해명은 받아들인 순 있지만 더 이상 자기 위안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원불교는 100주년을 맞이해서 사회의 빛이 돼야 한다.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지표의 역할을 자임하여야 한다.

빛이 되려면 내가 타올라야 하듯이 희생과 고난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고난이 없는 종교가 성공한 적이 역사상 있던가. 아무리 상생 종교라 하더라도 아픔과 갈등이 있는 곳을 찾아가지 않는 상생이 과연 상생일 수 있을까.

무엇보다 원불교 교도들의 사회적 상호작용의 역량을 높이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동안 교무들에게 시행했던 역량 개발의 방향을 돌려 이제는 밀양 송전탑에서, 제주 강정 마을에서, 원자력 발전소 앞에서 이뤄 나아가야 한다. 마음공부로 현대인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전문가들도 많이 나와야 하지만 사회적 맥락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며, 배은 중생을 제도하고 좋은 세상 만드는 일에 헌신할 활동가도 많이 양성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원불교 환경연대에서 추진하는 '대안에너지 협동조합'은 그 의미가 크다 하겠다.

협동조합은 이 세상을 경쟁이 아닌 협동의 가치로 세우려 했던 대종사의 혜안과 경륜을 제도적으로 실천하는 소중한 작업이다.

이러한 사업에 교단은 더욱 관심을 가지고 지원하고 독려하며 함께 해야 한다. 또한 햇빛에너지협동조합을 100주년의 중요한 사업으로 설정하여 전국적인 대안 에너지 실천 운동을 펼쳐나가며, 교단 내 다양한 협동조합 운동의 기폭제로 삼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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