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통제보다 소통이 더 낫다
SNS로 세상과 소통하며
'나를 외치다'

▲ 집 근처에 위치한 탄천을 산책하고 있는 신호빈씨 그는 10대를 탄천에서 보낸 추억이 있다.
'시한부라 하셨지만 시간을 정해 놓은 사람은 없습니다.'
- 손석희 JTBC 보도 담당 사장이 신호빈씨의 편지에 대한 답장의 내용 중

대부분의 청춘들은 서른이라는 나이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기대감을 갖고 살아간다. 20대를 살다보면 서른이라는 나이에 대해 무게감을 두기 마련이다. 하지만 신호빈(31)씨에게 서른은 '또 다른 서른'이었다.

그에게 '두려웠던 서른'은 다시 살아가야할 동기를 찾아줬고, 어두웠던 20대를 다시 살 수 있게 한 나이였다.

용인시 자택에서 볼 수 있었던 그의 모습은 스무 살 이후 '전신성 경화증'이라는 희귀병을 앓았다는 사실과 예후가 좋지 못해 병원에서 치료를 포기한 환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의 밝은 미소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서른이란 나이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 때 이미 죽어있을 것이다', '죽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며 "막상 그 시간이 닥치고 시한부 판정을 받으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됐다. 생각했던 것보다 두렵지 않았다.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았구나'라는 희망을 얻었다"고 회상했다.

이런 그도 한때 성공지향적인 젊은이었다. 맏이라는 책임감이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이를 강요하지 않았지만 '부모님을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에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다른 이들에게 가장 화사했던 시절이었을 20대지만, 그에겐 발병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시기였다. 그는 이 방황의 터널에서 빛을 찾았다. 진정한 '나'를 찾았다. 세상과의 소통을 시작했다.

그는 "위로가 되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 시작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기대감 없이 보냈지만 답장을 받으니 정말 큰 위로와 힘이 됐다"며 "그 이후 틈이 날 때마다 짤막한 일기 같은 글들을 SNS에 올려 소통을 시작했다"고 밝게 웃었다.

그가 사람들과의 소통을 시작한 후 많은 사람들에게서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 박원순 서울시장, 이해인 수녀, 작가 공지영, 야구선수 박찬호, 영화배우 차인표 등 많은 이들이 따뜻한 인사와 용기를 주었다. 이는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의미를 되찾고, 고통을 이기는 힘을 됐다.

그런 그에 대해 김덕연 죽전교당 교무는 "그는 '진통제보다 소통이 더 낫다'라는 말을 했다. 그동안 아버지만을 바라봤던 삶을 살다가 소통을 통해 더 넓은 세상으로 다가간 것이다. 진통제로는 순간의 아픔만을 잊을 수 있다. 소통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얻은 것이다"며 "시한부 판정을 받은 것이 오히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계기가 된 것이다. 호빈이는 생사해탈을 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생사의 자유를 얻은 것이다"고 강조했다.

그에게 있어 고통 속에 지낸 10년의 세월은 짧지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것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든든한 '아버지'가 있었다.

신태균(신호빈 아버지)씨는 "나라도 그 심정일 것이다. 발병 후 절망에 빠진 호빈이는 세상을 받아들려 하지 않았다. 마음의 문을 철저히 닫았었다"며 "서로 얼굴을 보면 싸우기만 했다. '삶의 의미'를 찾게 해주고 싶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메일이나 쪽지를 보냈다. 확인을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언젠가 마음을 알아줄 것이라 생각했다"고 두 눈을 감았다.
▲ 신호빈씨(가운데)와 그의 아버지 신태균씨, 그리고 김덕연 교무.

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는 늘 그의 곁을 지켰다. 어디를 가든 함께였다. 2011년, 2주 동안 혼수상태에 빠지며 그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병원에서는 어렵다고 했다. 이때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병원에 있어도 똑같다고 해 집으로 데려왔다.

이후 '아버지'는 꼬박 2개월을 그에게 매달렸다. 기적처럼 다시 살아났다. 그런 후 그는 아버지와 함께 〈신호빈의 나를 외치다〉를 출판했다. 그에게 '아버지'는 인생의 가장 큰 스승이고 전부였고, 신태균씨에게 딸은 세상을 살아가는 또하나의 희망이었다.

그는 "이 책은 '아버지'를 위한 것이다. 지금까지 못난 딸 때문에 고생한 '아버지'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덕분에 고통을 이기며 독하게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것 같다"며 "나를 외치고 살았지만 결국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우리 아버지를 알리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강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음식을 씹을 수도 없고, 소화시킬 수도는 상황에서 27세 때 경직된 두 다리는 절단해야 했다. 이런 상황을 거친 후 작가로서 책을 출판했다. 이렇게 출판된 책은 가족들에게 기쁨과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는 "책이 서점으로 가기 전에 출판사에서 책을 가지고 왔다. 아직도 기억난다. '축하합니다'하며 문을 들어왔다. 우리 가족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무 감격했다. '아버지'도 믿지 못하셨다"고 말했다. 신태균 씨는 "'우리 딸이 정말 책을 냈구나'하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살아있는 것마도 기적인데 눈 앞에 놓인 책을 보니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동안의 고통이 모두 사라진 것 같았다"며 부녀는 서로를 바라봤다.

그는 "나에게 마흔을 생각하기는 아직 두렵다. 그래도 진정성 있는 글을 쓰는 작가로써 살아가는 나를 상상해 본다"며 "이 꿈을 위해 더욱 많이 노력할 것이다. 배우고 또 배울 것이다. 작가라는 꿈을 계속 갖고 살 것이다"고 포부를 밝혔다.

'두려웠던 서른'이 지난 그는 책임감을 내려놓고, 작가의 꿈을 꾸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진정성 있는 글을 쓰기 위한 마흔'을 준비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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