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욕망의 기호, 돈

▲ 채희윤 교수.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돈은 사실상 인간 행위의 기본이며 돈의 부재(不在)는 곧 생존의 불가능과 직결될 만큼 우리의 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다. 광주여성재단(대표이사 이윤자)은 매월 한차례씩 철학, 노동, 문학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청해 '돈'을 주제로 인문학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11일 광주여성재단 8층 강의실에서 진행된 인문학 강좌에서는 채희윤 광주여자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가 '욕망의 기호, 돈'을 주제로 특강을 했다. 그는 특강을 통해 시와 소설 속에서 보여주는 돈의 속성을 분석하며 물신주의로 인한 인간 소외 현상을 조명했다.

화폐 형태 변화 인식 변화 촉구

일반적으로 화폐는 인류의 삶과 같이 해왔다는 데에 모두 공감할 것이다. 예전에는 철저하게 물물교환이었다. 그후 금속화폐가 나오고 종이화폐가 나왔다. 그 다음 전자화폐가 나왔다. 요즘에는 심지어 카드가 스마트폰에 들어있어서 카드를 갖고 다닐 필요가 없게 됐다.

형태의 변화가 단순한 것일까? 형태의 변화는 절대 단순한 것이 아니다. 형태의 변화는 인식의 변화를 촉구한다. 인식의 변화가 없으면 형태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교환의 형태로써 금본위제도 아래에서 주조된 화폐의 시대에서 지폐로의 변환과정은 경제적 형태뿐 아니라 인류의 특히 서구인들에게는 엄청난 심리적 변화를 초래했다.

언제든지 동일한 금으로 태환되는 화폐에서 불환되는 지폐로의 변화는 인간의 사고를 변화시켰다. 그 자체로 존재 가치를 지닌 금화에서 종이화폐, 전자화폐의 변환은 물질의 속성과 그것의 가치를 동일시하던 시대의 사고를 바꿨다. 이제 가치는 동일하다고 머리 속에서 인정될 뿐이다. 언제나 내 것으로 보관 가능하다고 믿었던 화폐는, 동등의 가치만 지닌 것이며, 내 것으로서 변화돼 장롱 속에 놓일 수 없다는 데에서 오는 심리적 허탈과 박탈감은 쉽게 대체물을 찾을 수 없게 한다. 나도 70년대 교사로 근무하면서 월급쟁이 생활을 했다. 그때 두툼한 월급봉투를 처음 받았을 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학교에서 이제부터 교사들의 월급을 현금으로 주지 않고 통장으로 준다고 통보했다. 편리하긴 하겠다고 인정하기는 했지만 한 동안은 섭섭했다. 월급이 통장으로 들어오면서 월급날 외상값 갚고 동료들과 술 한잔하면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나눴는데 지금은 이런 문화가 사라졌다. 나도 요즘은 거래를 할 때 통장으로 입금해 준다. 거래만 남고 인간적인 것이 사라졌다. 문화의 변화를 가져 온 것이다.

사고의 변화는 그에 대한 인식의 재정비를 요구한다. 즉 이제야 현실적이고 매우 대중적으로 실재와 상징이라는 것에 대하여 자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든지 금으로 변화하는 화폐의 실제상에 기인한 실재와 그것을 그렇게 인정하겠다는 내적 실제성은 같지만 실재성을 소멸시키는 상징화 작용을 가장 흔한 형태인 일상생활을 통해 지폐의 상징적 속성을 현실화 시켜야만 했다. 지폐야말로 돈이지만, 그것이 금으로 가역적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예술작품이 인간의 영원한 희구적 갈망을 채울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 자체는 아니라는 철저한 인식의 변화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이처럼 화폐의 변화는 우리 인간의 심리와 연관돼 간단하지 않다.

화폐와 문학의 상사성

돈과 언어는 인간에게만 유일한 도구적 수단이다. 아무리 고등동물이라고 해도 동물들이 돈 주고 사먹지 않는다. 동물은 절대로 그러지 않는다. 동물도 언어적 행위를 통한 의사소통을 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언어처럼 본질적인 것은 되지 못한다.

돈과 언어는 사회적 계약이라는 동종성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언어가 그렇듯이 돈 역시 사회적 계약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1000원짜리 지폐가 갖는 교환적 가치와 1만원짜리가 갖는 교환적 가치는 그 10배만큼 크다는 데에 사회적 승인을 했다. 그래서 1만원짜리 한 장은 1000원짜리 지폐 열장과 동등하게 바뀌며, 이는 어느 지역이나 동일하다.

돈과 언어는 간편과 간략의 경제성 동질성을 갖고 있다. 입 열지 않고 설명하는 게임을 해봤을 것이다. 미치고 환장할 것이다. 말처럼 정확하게 우리의 심정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짝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관심을 받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한다. 상대방에게 말로 "나는 너를 좋아 한다"고 말하면 해결 될 것을 말을 못하고 마음을 조인다. 이처럼 언어는 간략하다. 돈도 마찬가지다. 금은 무겁고 불편하지만 지폐는 지갑에 넣어 휴대하기 편리하고 교환이 용이하다.

돈과 언어는 추상적 사용이라는 특수성을 갖고 있다. 언어는 추상적이다. 학문적으로 예술적으로 갈수록 더 추상화된다. 박두진의 '수목의 고향'이란 시에서 보면 '낙엽은 해마다 땅에 쌓였다. 수목의 고향은 하늘'이란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수목의 고향은 하늘'이란 부분이 잘 해석이 되지 않을 것이다. 수목의 고향이 하늘이라니? 왜 나무는 땅에 뿌리를 박고 서있는데 고향이 왜 하늘이라고 할까라는 의문이 들 것이다. 이는 언어의 추상적 사용에 기인 되기 때문이다.

문학의 특성 중 하나가 언어의 경제성이다. 문학은 언어의 특별한 사용이다. 문학 언어는 일반 언어 그것과 다르게 사용했을 때 언어예술이 가능하다. 그 중 가장 흔한 것이 비유법이다. 비유적 언어는 언어의 경제성에 입각하여 동일한 효과를 냄으로써 보다 깊게 우리들의 마음 속에 지시체에 대한 인상을 갖게 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물물교환 때에 물건이나 화폐경제의 화폐가 갖는 경제성 역시 이런 교환과정과 동일하다. 특히 시라는 장르는 언어를 경제적으로 사용하는 가장 좋은 본보기이다.

돈과 현대 소설

20세기는 산문의 시대라고 한다. 소설로 들어오면서 요즘 작가들이 가장 쓰고 싶어하는 것이 방송드라마이고 그다음 동화라고 한다. 왜냐하면 잘 팔리고 돈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테네 타이먼'이란 시에서 셰익스피어는 돈은 '검은 것도 희게 늙은 것은 젊게 추함을 아름다움으로, 비겁도 용기로, 악도 선으로 천함도 고귀하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셰익스피어의 시대에도 돈의 위력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쉘(Shell)은 돈, 언어, 그리고 사유실존의 관계를 조명하는 것이 현대 문학연구의 한 방편이라고 했다. 그는 현대소설에서 돈의 기호는 공공연하든지, 아니면 매우 상징적으로 거의 모든 작품 속에 드러난다고 보았다. 이를테면 우리 30년대 소설의 궁핍의 문제와 70년대 소설의 사회적 소외의 문제는 분명하게 돈과 관련된 것이다.

맑스(Marx)는 "내가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을 돈의 수단에 의해서 할 수 있다"라고 말하며, 돈의 인간 소외력의 능력에 대해 예견했다. 인간 소외 현상은 근대적 사유의 산물이며 현대소설에서 가장 잘 다루고 있다. 소설가 카프카는 철저하게 인간 소외현상을 썼다. 그는 〈성〉, 〈심판〉, 〈변신〉등 작품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소외당하는가를 말하고 있다. 현대소설의 대부분은 인간의 소외를 다루고 있다. 소설문학이 근대역사를 가장 잘 받아들였다. 소설은 현대사회를 가장 문학적으로 접근을 많이 했다. 그래서 우리는 현대는 산문의 시대라고 한다.

소설을 통해서 현실 재현을 꿈꾸던 현실주의자들에게 지폐로 이행은 현실이 아니라 현실 속의 욕망을 그리게 했고, 그들의 소설 역시 돈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돈은 소설의 의미론에 있어서 사회적 성격을 말하는 주요한 이미지가 된 것이다. 돈의 이미지 변용은 돈이 권력과 사회적 위치를 결정한다는 인식의 결정으로 말미암아 작동하기 시작했으며 현대 소설 대부분에서 나타나는 공통적 현상이다.

이제 돈은 노동과정이나 물질생산 뿐만 아니라 문화 전체, 성행위, 인간관계, 환각, 개인적 욕망마저도 지배한다. 우리의 생명과 직결된 농업의 농토도 이제 부동산이라는 명사로 상품화됐다. 우리 소설은 이렇게 자본에 의해 잠식되어 파멸해가는 인물들을 줄기차게 그리고 있다. 이제 농토가 아니라 땅이 환금성을 얼마나 갖느냐가 땅의 가치를 결정한다. 농지의 사용가치는 이제 돈으로 교활 될 수 있는 가능성의 고하에 따라 달라진다. 일 자체의 신성함, 노동의 신성함은 사라지고 얼마나 버는 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사용가치가 아니라 교환가치가 절대화된다. 이런 자본에 의한 노동력의 예속화는 우리 시대의 인간조건에 대한 가장 폭력적 형태이다.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은 이러한 시대상을 보여주며 현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돈이 종교

돈은 이제 종교가 됐다. 돈이 신앙이 됐다. 철학자 벤자민(Benjamin)은 자본은 이전에 종교가 주었던 것과 똑같은 걱정과 고통, 그리고 불안을 잠재우는 데 본질적으로 기여한다고 했다. 자본, 돈이 종교인 것은 종교가 행하는 방식대로 행하기 때문이다. 돈의 획득과 상실로 좌우되는 현대인들의 삶의 형태는 종교의 신앙행위와 다름없다.

자본, 돈을 종교라고 보는 또 하나의 이유는 돈에 의해 추동되는 자본주의는 자신을 목적화하는 것 때문이다. 즉 모든 종교가 신의 존재를 절대적,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입상화하는 우상화 과정처럼 이제 돈벌이 자체가 바로 자기 목적성을 띠는 것이다. 돈은 수에 불과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된다. 현대사회에서 소득과 욕망의 메울 수 없는 간극 때문에 인간은 끊임없이 빚쟁이가 되고 만다. 빚은 소비사회 구성원에게 운명처럼 부과된다. 그것이 있는 한 자본주의는 영원할 것이다.

영원한 자본에 대한 목마름, 그 부채의식을 현대소설은 진단하고, 나름의 치료를 권하고 있다. 소설은 우리로 하여금 돈의 지배하는 자본의 경제로부터 조금 소외시키고 내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면에서 소설의 현존성과 현재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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