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덕산 미륵사.
정수사(淨水寺)는 신라말기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뒤에 진묵대사가 중창한 완주 상관면의 작은 절이다. 정수사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잡으면 강삼마을이 나온다. 미륵사 주지가 말했다.
"여그서부터 만덕산 자락이지요."

만덕산은 변산에 비하면 산세가 작았다. 가파른 등성이를 타고 올라 만덕산 정상에서 늙은 중은 말했다.
"이 산등성이를 경계로 완주와 진안으로 갈리지라오. 우리 절은 완주군 소양면에 속하제."

노승은 두어 겹 건너편 산을 가리켰다.

"저어그에도 진묵대사께서 중창하신 원등암이 있고 그 너머에는 대사께서 출가하신 봉서사, 저쪽 산 아래 소양천 암굴에는 단암사라는 절이 있지라."

"이상합니더. 진묵대사께서 전주를 중심으로 멀리 부안 변산에 월명암, 당신 고향인 김제에는 망해사, 그리고 대원사, 일출암, 정수사, 미륵사, 원등암 주로 완주에 많이 계셨는가배요?"

"그 양반이 전주를 무척 좋아하셨제. 공부한다고 전주 장에 자주 댕겼응께."
정수사에서 만덕산 주봉을 넘어 미륵사까지 1시간 걸렸다.

이렇게 정산은 월명암을 출발하여 전주를 우회하여 진묵이 머물렀던 대원사·정수사를 경유하여 미륵사에 도착하였다. 부안 변산 실상동에서 완주·진안 군계에 있는 만덕산의 미륵사까지는 2백리 길, 도보로 20시간 걸리는 노정이었다. 오다가 이틀 밤 쉴 참을 잡으면 사흘은 걸어야 완주할 수 있는 거리다. 정산은 왜 사부주께서 미륵사까지 자기를 보냈는가를 조금 알 것 같았다.

미륵사는 월명암에 비하면 규모가 작은 빈찰이었다. 노승 혼자 사니 주지라 내세울만한 것도 없는 처지였다. 먼지를 털고 마루를 닦고 난 뒤 노승은 정산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청하였다. 맞절을 하고 말했다.

"소승은 신옹이요."
"지는 명안이라 부릅니더."
신옹信翁은 마흔 중반에 출가하여 10년 넘게 불목하니로 지내다가 말사를 맡아 혼자 지낸다고 하였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제라. 혼자 탁발하여 끓여먹고 살제라. 요즘 와서 화주보살 하나 생겼으니 참 신기하데요."

며칠 뒤 쉰 줄에 들어 보이는 화주보살이 나타났다. 그녀는 정산을 보더니 두 눈이 휘둥그레져 털버덕 흙바닥에 이마를 처박았다.

"이 화주보살이 실성을 혔나? 산중에 잘생긴 젊은 중을 보더니 기절초풍을 허네이."

영문을 잘 모르나 정산은 대원사에 있을 때 치성 드리러 왔던 아낙들이 동산에 달이 떠올랐다며 수다 떨던 일이 생각났다. 유독 보살들이 자기를 잘 따르는 것을 보니 참 신기도 했다.

늙은 중 신옹이 신신당부를 했다.

"명안 스님, 보살들한테 정 주마 안 되요이."
"주지시님, 그게 아녀라. 지가 조선 팔도 산천을 안 밟은 데가 없지만 이 시님처럼 상호가 잘생긴 분은 처음 보그만이라. <소대성전>의 백운도사가 화현한 것 같으요."

"아매 백운도사가 총각 때였던가 보제?"
"맞아라! 시님 말삼이 맞아라! 지가 꿈에 봤그만이라."

그로부터 화주보살은 이틀거리로 나타났다. 올 때마다 불공 손님을 끌어왔다. 등 너머 자기 산제당에 공들이러 온 신도를 이리로 데리고 온다는 거였다. 신옹이 희색이 만면했다.

"내가 복덩이 스님을 모셔 왔그만이. 명안 스님, 부디 오래오래 우리 절에 머무소."

노승이 젊은 스님을 신주단주 모시듯 했다. 명안이 온 뒤로 세 끼 공양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탁발하러 다닐 일이 없어졌다. 화주보살과 불공 온 아낙들이 공양간에 드나들어 깨소금에 참기름 내 진동하는 맛깔스런 반찬이 삼시 세 때 올라왔다. 보살들은 정산을 볼 때마다 입이 귀에 걸리고 연신 굽신굽신 합장했다.

정산이 물었다.
"화주 보살은 어디 사는데 자주 오능교?"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응게 자주 오제라. 바로 이 등 넘어 산제당에서 정성들이며 산당게요."
▲ 전북과 서울의 총연원 삼타원 최도화.

화주는 전주 최씨이고 이름이 인경仁京(1880. 2.1-1954.11.3)이었다. 인경은 젊은 객스님을 보고 말할 수 없는 희열이 솟았다. 그녀가 그동안 몽매에도 그려오던 도인 상이므로 '생불님'으로 받들고 따랐다. 정산은 몇 해 전 대원사에서 태을주 치성을 할 당시 정읍 북면에 사는 한들댁이 만국양반으로 모시고 받들던 때와 똑같은 일이 또 생겼다. 미륵사 무렵의 정산의 나이는 불과 스물세 살이었다.

정월 보름 전후하여 근동의 아낙들이 떼를 지어 모여들었다. 비단장수 화주보살이 부지런히 발품을 판 덕이었다. 세끼 끼니 걱정하던 빈찰이 활력이 넘쳤다. 그러던 어느 날, 정산은 새벽에 묵묵히 앉았다가 화들짝 놀랐다. 우렁우렁한 사부님의 목소리였다.

"미륵사에 오래 머물 곳이 못 된다."
문득 사부님이 평소 자주 하던 말이 떠올랐다.

"일찍이 진묵대사께서 '후천에는 참 중은 하산하고 엉터리 중은 입산한다'는 말을 하셨제. 대저 산중은 대기(大氣)가 응하지 못하니 큰일을 이루려면 광야로 나가야 하는겨."

미륵사 뒤 벼랑바위에 진묵이 조성한 석탑과 불상이 있었다. 바위짱을 쌓아올린 것인데 갓쓴 부처님 형상이었다. 정산은 봉래정사 사부님에 대한 향념이 가슴에 가득 찼다. 정산은 더 이상 머물러 있기가 곤란하다 생각되어 부안 가는 인편에 그 동안 경과를 보고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봉래정사에서 소식이 왔다. 편지 받는 즉시 돌아오라는 글이었다. 정산은 편지를 쥔 채 그대로 부안으로 향하였다.

석두는 정산을 보자마자 이 말을 하였다.

"요즘 송규가 얼굴이 붕붕 뜬다?"
"아입니더."
송규가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 하자 석두거사 말하였다.

"니 혼자 좋은 기 먼 재민겨. 다 좋아야 진자미지."
석두는 송규의 속내를 따지지 않고 넘어갔다. 그로부터 정산은 월명암에 올라가지 않고 석두암에 머물렀다.

인경은 흠모해 마지않는 젊은 스님이 매양 한 벌 옷으로 지내는 것을 짠하게 여겨 마을에 내려가 바느질 솜씨 좋은 아낙을 골라 정성들여 비단 솜옷 한 벌을 지어 가지고 절에 올라왔다. 어쩐지 절이 쓸쓸하고 텅 빈 것 같았다. 명안 스님이 보이지 않았다.

"시님, 시님!"
넓지 않은 도량이라 명안이 있을만한 곳을 다 찾아다녔다. 주지 신옹이 해가 기울 참에 아래 마을에서 올라왔다.

"시님, 명안스님이 안 보이네유?"
"내가 알어? 말없이 가버린 사람을"
"무단히 시님을…… 말없이 가요?"

두 사람 말투가 시비조가 되었다. 주지는 화주가 명안을 다른 산제당으로 빼돌렸다는 것이고, 화주는 명안을 생불님 받들듯이 하는 꼴을 보다 못해 주지가 다른 절에 숨겼다고 주장하여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여자 홀몸 삼십 년에 신중 노릇도 하고 화주 노릇도 하고, 거기에다가 보따리 장사 이력까지 붙은 인경을 당할 수 없었다.

인경은 다툼질이든 거간을 붙이든 돌리고 윽박지르는 변통성이 능해 물정 모르는 신옹을 구슬러 조단조단 캐물어 명안을 찾아 부안 변산 실상사까지 2백리 길을 찾아갔다.
▲ 박용덕 교무/군북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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