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正典)〉으로 무장하니 죽음도 두려울 것 없네'

▲ 고 윤성인 정토와 아들 문덕은.
1년 전 윤성인 정토의 일기 한 구절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내 뒤를 따르게 될지도 모르는 아픈 사람들이 쉽고 재미있게 자신의 병을 큰 공부거리로 삼아 공부해나갈 수 있도록 나의 발자취를 남겨보고자 이렇게 정진하고 있는 중이라고 위안을 삼아본다."

윤 정토는 원불교 입교 후 일기 기재를 통해 황직평 원로교무에게 항상 문답감정을 받으며 법의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공부인이다.

윤 정토의 남편 문성도(익산 역전보화당한의원 원장) 도무는 "교전 사경노트와 마음일기를 기재한 노트가 여러 박스가 될 정도로 사명감을 갖고 공부에 매진했다"고 밝혔다. 특히 3년 전 말기암 진단을 받고도 차분하게 받아들이고 정성을 다해 치료하는 것을 공부삼아 했다.

8월24~25일 윤 정토와 함께 공부해 왔던 공부인들이 고성 '화해를 공부하는 집'에 모여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정전마음공부로 치열한 공부인

7월30일 47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 윤 정토에 대해 문 도무는 "스무 번이 넘는 항암치료도 밝고 씩씩하게 받았다. 집에서 요양하는 중 통증이 있을 텐데도 가족들이 걱정할 까봐 내색을 하지 않았다"며 "힘이 없어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중에도 스스로 일어나려 최선을 다했다"고 추모했다.

발인식 고사에서 문 도무는 정토의 일기 한편을 소개했다.

"외출을 할 때면 가방 속에 항상 〈정전〉을 먼저 챙기는 습관이 꽤 오래되었다. 여자들은 외출할 때면 항상 핸드백 속을 미리 점검한다. 립스틱, 거울, 빗, 화장지, 휴대폰, 손수건, 지갑 등. 그리고 마지막에 〈정전〉을 꼭 챙겨왔다. 최근 항암치료로 삭발 후에는 더 단출해 졌다. 지갑, 〈정전〉, 화장지로. 이제 40대 후반이다. 많았던 아픔과 말 할 수 없을 만큼 안개같이 흐리고 어려웠던 좌충우돌 세상살이, 이제 대종사님 밝혀주신 〈정전〉으로 무장이 되고 보니 죽음도 그다지 두려울 것이 없다. 그런 점이 참 좋다."

온 힘을 다해 공부하고 최선을 다해 살았으니 여한이 없으리라는 것이다.

문 도무는 "열심히 공부하고 살아온 공부심과 스승님들의 법력에 힘입어 언어도단의 입정처이며 유무초월의 생사문인 일원의 체성에 합하여 대 자유인이 되길 기원한다"고 고사를 마쳤다. 자녀 덕은이와 자신은 일원대도에 의지해 마음공부 열심히 하고 공도사업에 온 힘을 다하겠다는 다짐도 잊지 않았다.

윤 정토는 일기기재의 변화되는 점에 대해 "일기를 기재하다보니 모든 것이 다 신앙이 되어진다. 경계도, 그 경계를 통해 있어지는 나의 마음들도 다 일원상의 진리, 신앙, 수행으로 공부가 되어 진다. '신앙을 하는 것'과 '신앙이 되어지는 것'은 비슷한 것 같아도 다르다. 신앙을 하는 것이 머리로 하는 것이라면, 신앙이 되어 지는 것은 마음으로 수용이 되는 것이다. 일기기재를 안하면서 머리로만 아는 것과 일기기재를 통해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신앙하는 것은 해보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다. 신앙은 생각(머리)이 아니라 느낌(가슴)이다. 느낀 만큼 이해가 되어 지고, 이해가 되어 지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 나에 대해서도 상대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밝혔다.

아픔으로부터 마음의 자유를

열반 1년(2012.2~2013.1)전 그의 〈정전〉 마음공부 일기를 읽다보면 참다운 공부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지난해 대각개교절을 기념해 쓴 일기에는 "이 법, 이 공부 만나서 이 공부를 하니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고, 했더라도 돌아올 곳이 있네. '공부를 해서, 잘 산다고 해서 무엇이 특별히 좋은가? 잘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오랫동안 이러한 의문을 갖고 있던 나를 이 법으로, 이 공부를 하니, 내 안, 내 삶에 대한 희망이 저절로 생겼고,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뚜렷한 목표를 영생토록 갖게 해줬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그는 '나에게 정전은?'이라는 일기에서 "정전은 외출할 때 꼭 필요한 존재가 됐다. 또 정전의 어느 부분이 좋아서 입교 했는가를 생각해 보니 개교의 동기에서 '사실적 도덕'이라는 구절을 보고 참 많이 놀랐던 것 같다. 4대조부터 천주교 신앙을 해온 뼛속까지 천주교 신자인 나의 친정에서 늘 의문과 회의를 느껴오던 도덕과 현실생활에 대한 불안함과 유리감이 한순간에 통쾌한 해방구를 느끼게 해주었던 구절이었다. 그래서 교전을 처음 보던 바로 그 자리에서 남편과 같이 입교도 하고 바로 법명도 받고 또 10분도 안 되어서 바로 원불교 도무로 전무출신 서원도 번갯불에 콩 튀겨먹듯이 하게 됐다"고 밝혔다.

윤 정토가 정전 마음공부를 접하게 된 것은 〈원불교신문〉에 난 정기훈련 광고를 보고 부터다. 또 광고 타이틀이 일시에 눈에 들어와 혼자서 수계농원에 가서 훈련을 했다. 그 결과 심신의 큰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때가 20대 후반이었다.

40대 후반이 된 그는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정전으로 무장이 되고 보니 이제 죽음도 그다지 두려울 것이 없고 참 좋다."

암은 축복

만덕산 황토방에서 요양 치료 때의 일기이다. '오늘은 두 쌍이 여기 머물다 돌아가신 분 이야기를 들었다. 웃으면 면역 치료에 좋다고 웃으면서 등산을 다녔으나 결국 죽더라는 것. 그런데 오늘은 그런 말을 들어도 별로 요란하지가 않다. 막상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고 보면, 또는 암을 축복으로 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니 어쩌면 무의미하게 삶에 집착하는 것 또한 서글프기 짝이 없기도 한 것이 지금의 솔직한 나의 심정이기도 하다. 그래도 기쁘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보은하는 것이라 생각하므로 입맛이 없어도 열심히 먹고, 살아있는 소중한 동식물들과 접촉하고 교감하면서 대낮의 빛을 쬐며 바람을 느끼고 구름을 보고 멀리 있는 아들과 남편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그렇게 살고 있는 이 시간들이 너무나 아름답고 소중할 뿐이다.'

그는 '암은 축복이다'로 받아들였다. 한 공부인에게 보낸 메일에서 그는 "제가 암에 걸려 보지 않았다면 지금도 열심히 돈 버느라 정신없이 일만 했을 것이다. 진리께서 아무리 진공으로 들어가라는 싸인을 보내도 본 척도 들은 척도 안하니까(쇠약한 그 정신을 항복받아 물질의 지배를 받게 하므로), 그래서 암이 내게 축복을 감추고 온 것 같다"고 했다.

'암'이라는 경계를 만나 마음의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 안에서 일원상의 진리, 신앙, 수행, 서원문, 법어를 공부했으니 해탈을 얻은 산 공부인의 삶을 산 것이다.

16일 정토회관에서 거행되는 그의 종재식에서 윤 정토의 일기는 한권의 책으로 많은 공부인들과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우리들 곁에서 보이지 않는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을 윤 정토의 생생한 웃음이 가을바람으로 살랑거린다.
▲ 윤 정토는 만덕산 황토방에 머물며 건강을 살폈다.

故 윤성인 정토는 …
윤성인 교선은 1966년 5월2일 경남 함안군에서 부친 윤병준 선생과 모친 문소순 여사의 6남 3녀 중 여덟째로 출생했다.

성격은 밝고 활발하여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을 좋아했다. 품성이 다정하고 인자하여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을 즐겨했다. 부산 경성대학교 약대를 졸업하고 병원과 약국에서 약사로 활동했다.

원불교는 원기81년 2월6일 입교해 교법을 믿고 수행하는데 노력했다. 정전 마음공부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생활했다. 1991년 문성도 도무와 결혼해 아들 덕은이와 함께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한 이뤘다.

윤 정토는 2010년 5월 유방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는 가운데에도 기도와 감사생활로 일관하며 정토회교당 동지들과 법연을 더욱 두텁게 했다. 유지비를 챙겨 올리는 등 공부심을 잃지 않으며 치료에 정성을 다해왔다. 그러나 쾌유의 기원을 뒤로하고 7월30일 오후 1시30분에 47세의 짧은 생을 정리하고 열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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