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값 해야 한다"

대종사께서 "이름 값 하라"는 말씀에 일직심으로 일관하며 따뜻한 성품으로 인정과 사랑을 베푼 삶. 평생을 공명따라 호오의 가림 없이 교화현장에서 제도 사업을 한 염타원 박영권(念陀圓 朴永權, 1918~2003) 대봉도.

구인선진으로 불법연구회에 입참한 일산 이재철 대봉도가 그의 외숙이다. 외숙의 인도로 대종사를 친견하고 '영권'이란 법명을 직접 받았다. 이러한 인연으로 영산을 오가며 학원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봤다. 모두가 새롭고 좋아 보였지만 결혼을 안 하고 공부를 할 수 있다는데 매력을 느껴 출가를 결심했다.

원기21년 19세 되던 해에 꿈에 그리던 불법연구회로 왔다. 첫 번째 일은 공양원으로 대종사의 시봉을 돕다가 얼마 후 학원생활을 시작했다. 총부 교감인 주산 송도성 종사의 강의와 대종사의 법문을 받들며 1년을 보내자, 구타원 이공주종사를 보좌하며 통신부 업무를 보게 했다.

원기26년 교화계로 첫발을 내디뎠다. 첫 부임지는 부산의 하단교당이었다. 교단 초기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교당이라 부담이 커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자 대종사께서 "내가 제일 많이 가는 곳이 서울과 부산이다. 그때 볼 수 있지 않겠느냐"며 마치 부모가 자식을 달래듯 위안과 용기를 주었다.

부임한지 1개월여 만에 대종사께서 방문했다. 교당이 너무 외진 곳에 있는 것을 보고, 남부민교당의 은타원 조일관 대봉도와 맞바꾸게 했다.

때는 해방 직후라 전재동포들이 일본 등지에서 귀환하고 있었다. 부산지역의 초량·당리·남부민교당 등이 힘을 합해 전재동포 구호사업을 헌신적으로 전개했다. 이 공덕으로 일본 신사 터 건물을 무상으로 인수 받았다. 그는 건물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서정지부'라는 간판을 걸고 교화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군인들이 교당을 점거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후 오랫동안 경남교당 등으로 사용되다 그 터에 현재 부산교당이 건립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원기37년에 신도안에 소재한 남선교당으로 발령을 받았다. 정산종사께 인사를 드리자 "부산에 살다 그 어려운 교당으로 어찌 가겠느냐"며 걱정을 했다. 그 곳에서 8년을 사는 동안 식생활 마저 어려워 사가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곤궁한 생활이었다.

원기44년 금산교당으로 이동했다. 그다지 큰 교당은 아니었지만 남선교당에 비하면 고래등 같은 교당이었다. 이후 용신·수지·화포·수계교당 등 45년간을 어머니 같은 따뜻한 인품으로 자비인정 교화를 펼치며 일원대도를 전하는데 헌신봉공 했다.

퇴임 후 수도원 생활은 너무 편하고 한가로워 빚지는 생활 같았다. 틈틈이 붓글씨를 쓰고, 경전공부와 인과의 진리를 연마하며 이 법 만난 다행함과 행복감으로 황혼의 기쁨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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