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결혼일이 얼마 남지 않아 청첩을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친가와 처가 및 외가 그리고 친지 등으로 나누어 보낼 곳을 정하려고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외가는 그렇다 치더라도, 처가 쪽이 좀 애매했다. 출가외인이라 했던가.

그쪽 애경사는 장인과 처남에게 미루고 다소 소홀히 했다. 연로하신 어른이나 어린 이에게는 청첩장을 보내지 않는 것이 법도라고 들었다.
이것 저것 따지다 보니 알릴 곳이 마땅치 않았다. 결국, 아내의 형제자매에게만 청첩을 내기로 했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딱 한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에게는 따질 필요 없이 꼭 보내야 한다. 처 외사촌동생이다.
보이지 않으면 마음조차 멀어진다 했던가. 못 본지 두어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깜박 실수할 뻔했다.

익산으로 이사해 주소를 알 길이 없었다. '청첩을 보내려 하니 주소 좀 알려 달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더니 답신할 여유도 없었는가, 전화가 먼저 왔다. 그도 내 마음과 같이 그리움이 반가움으로 분출된 듯하다.

아내의 외사촌 남동생(편의상 '처남'이라고 칭한다)을 뜻있게 만난 것은 수년 전이다. 언제 전주로 이사를 왔는지도 몰랐다. 주변 교당에 적을 두고는 있었으나 나가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러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런데 3형제 중 막내인 그가 장례를 치른다고 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수년간 병시중도 막내인 처남 내외가 해왔다고 한다.
아내는 "처남의 댁이 참으로 인성이 좋아 그 힘든 일을 흔쾌히 도맡아 했다"며 감동하고 있었다. 장남은 생활고 때문에, 차남은 다른 종교에 빠져서 등한시했다는 것이다.

아내가 나서서 처남과 협의해 우리 교당에서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별 연고가 없는지라 교무님 주재하에 처남 부부와 아들, 몇 분의 친척과 교도들과 그리고 우리 내외가 조촐하나 정성을 다해 종재까지 마쳤다.

본디 성품이 온유하고 착한 처남 가족들은 이 열반과 장례가 인연이 되어 우리 교당에 나오게 됐다. 어찌 보면 돌아가신 분이 장남과 차남을 다 제쳐놓고 의식적으로 막내에게 일생의 마지막을 의탁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의 잠재된 신심을 믿고 본인의 천도를 생각하며 말이다.

이들의 교단생활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낯설어 서먹했을 텐데도 아주 적극적이었다. 법회는 물론 각종 기념제나 기도 및 행사에도 빠지는 경우가 드물었다.

아침 일찍 나와 교당 주변을 청소하거나 안내를 하기도 하고 식당 설거지까지 돕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

부인은 아예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요양시설에서 일을 하고 있다. 아들은 전무출신을 서원하고 간사생활을 거쳐 예비 교무과정을 밟다가 군대를 가게 되었는데 자원해 원불교 요양시설에서 공익근무를 하고 있다. 그야말로 진실한 일원가족을 이룬 것이다.

이제는 익산으로 이사해 부송교당에 둥지를 틀었다. 비록 교당은 달라졌으나 그 신심과 서원이 어이 다르랴.
계속 정진해 법력이 증진되기를 축원한다. 오늘따라 그들이 더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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