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 주고 신심 북돋아 줘

▲ 천형구 교무/부안교당
교역자생활 18년. 돌이켜 보면 짧지도 길지도 않은 세월이지만 '전무출신의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라며 스스로에게 되물어 볼 때가 많다. 나는 동산선원 간사시절부터 지금까지 교단의 큰 어른들을 모시고 산 것을 큰 홍복으로 여긴다. 특히 예비교무 시절 방학 때마다 대산종사를 시봉했던 것은 말 그대로 축복이었다.

대산종사를 추억하면 늘 마음속에 아버지 같은 그리움을 느낀다. 성자이면서도 때론 천진무구한 인간적인 모습을 뵈올 때면 사람사이에 인정미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낄 때가 많았다.

예비교무 시절 방학이면 대산종사가 계시는 왕궁 비닐하우스를 많이 찾았다. 대산종사의 일과는 철두철미했다.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으신 일과는 지금 나로 하여금 많은 것들을 깨우치게 하는 산 경전이었다. 새벽 좌선을 마치면 우리는 대산종사를 지압해 드렸다. 나는 주로 대산종사의 발을 많이 지압했다. 지압 전문가는 아니지만 정성껏 해드렸다. 지압이 끝나면 대산종사와 함께 요가와 5단 호흡을 열심히 따라 했다. 대산종사의 천진무구한 동작들은 마치 어린아이가 춤추는 것 같아 우리는 뒤에서 키득 키득하면서 웃곤 했다. 그러면 대산종사는 뒤를 한 번 돌아보시면서 웃으셨다.

나는 대산종사를 모시고 산책을 하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자주 여쭤보곤 했다. "남자 교무들은 언제쯤 항마위가 될 수 있나요?" "남자들은 군대 갔다 오면 항마하고 여자들은 부교무 생활 마치면 항마하는 것이다", "보은헌공은 왜 하나요? 가난하고 돈 없으면 원불교 못 다니는가요?" "보은헌공은 내가 정당하게 번 돈이라도 그 돈 속에는 상대방의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다. 그래서 그 업을 함께 소멸하기 위해서라도 보은헌공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저는 계문에 있는 '신용 없지 말며'가 토가 안 떨어집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는 '신용 없지 말며'에 토가 떨어지는데 6년이 걸렸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으면 그것도 나 자신한테 신용 없는 것이며, 아침 밥 먹기 싫어서 안 먹는 것도 자기 자신한테 신용이 없는 것이다. 무슨 계획을 세웠다가도 하기 싫어 안하면 그것도 자신과의 신용이 없는 것이다." 그때 그시절이 지금도 그리워진다.

원불교학과 2학년 때로 기억된다. 삼동원에서 여름 하선을 마치고 영산·익산 예비교무들이 삼동원에서 대산종사를 배알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나는 학년 대표로 감상담을 했다. 나는 대산종사 앞에서 "저도 이공부 이사업, 열심히 해서 언젠가는 그 자리에 앉을 것입니다. 저는 종법사님을 닮아 가기 위해 머리도 삭발했습니다. 일단은 외형부터 닮아 가야 하니까요"라고 당차게 발표했다. 순간 대중은 한바탕 웃음이 터졌고 대산종사도 한 바탕 웃으셨다. 지금 생각하면 무례하기 이를데 없지 않나 싶었지만 그때는 정말 하늘을 뚫을 듯한 신심이 충만했다. 두려울 것이 없었다.

왕궁 비닐하우스에서 외부 접견이 있는 날에는 누가 조금만 무엇을 해도 대산종사는 "박수 치자. 잘했다"며 그 사람에 대한 자랑만 하셨다. 살려 주려 하시고 격려해 주시고 신심을 불러 일으켜 주셨다. 나는 그 심법을 닮아 가려고 한다. 대산종사의 심법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보고 배웠기에 교역자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하나의 표준이 됐다. "기도 해라. 오래하려 하지 말고 잠깐씩이라도 매일 20~30분씩 꾸준히 해야 한다"고 하신 대산종사의 법문 말씀은 지금도 귓전에 맴돈다. '10대 학문, 20대 고전, 30~40대 기도, 40~50대 평상심, 60대 함축, 70~80대 다시 준비(산송장)'라고 하신 대산종사 법문을 떠올리며 나의 마음을 다시 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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