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 地 無 非 自 性 定 1

마음 바탕의 본디는 어떠한 것인가? 본디에는 옳음도 그름도 없는 그런 상태가 곧 본 바탕일 뿐이다. 그런데 무명과 식이 생겨남으로부터 옳고 그른 분별이 나타나는 것이며, 이 옳고 그른 분별이 나타남으로부터 미(美)와 추(醜)의 구분이 생기고, 또한 좋고 나쁜 자기 선택의 기준이 생기기 마련이다.

따라서 무명을 깨닫고 식을 과감히 없애 버리는 것이 자성의 정을 되찾는 지름길이 될 뿐이요 그러자면 반드시 분별과 시비를 다 놓아 버리는 공부가 되어야 한다. 만약 분별과 시비를 마음속에 갊아 두고 사는 동안 자성의 정은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노자와 같은 성인도 이르시기를 "오색은 사람의 눈을 멀도록 하고, 오음은 사람의 귀를 먹도록 하고, 오미는 사람의 입을 망치게 한다(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고 했다.

즉 탐음하거나 호색한 즉 정을 상하여 눈을 멀게 하는 결과로 치닿는 것이요, 귀에 와 닿는 좋은 소리만 듣기를 좋아하면 화기를 잃고 본심을 잃어 능히 무성의 성을 들을 수 없는 귀머거리가 될 뿐이며, 입맛에만 따라 맛만 쫓아 나간다면 참다운 도의 맛을 잃는다는 말이다.

참으로 "도의 맛은 담담하기가 물과 같다(道味淡淡如水)"라 했다. 담담하다는 말은 물을 팔팔 끓인 뒤에 식혀 놓고 보면 이미 물속에 녹아 있던 불순한 요소들은 다 가라 앉아 버리고 깨끗한 물만이 남는 바로 그 깨끗한 물을 말한다.

소리만 해도 그렇다. 자신의 귀에 솔깃한 소리만 듣다 보면 자칫 여러 사람의 좋은 뜻을 저버리고 결국에는 외토리가 되고야 말 것이다.
색도 또한 마찬가지다. 탐음과 호색이 결국에는 실명으로 이어져 간다는 말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쪽으로 치우쳐 나간다는 말은 마치 음식을 섭취하는데 있어서 우선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을 취해 먹는 편식과도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어찌 건강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이 일시적으로 제 입맛에 맞는 음식만을 편식하고 산다는 말인가.

현명한 무리들은 제 본 마음을 그대로 갊아 두고 산다. 그렇기로 이를 검욕(檢欲)이라 하여 욕심을 경계하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이르기를 "말을 한없이 달려 사냥에 열중하는 일도 또한 마음을 발광케 하는 일이요, 얻기 어려운 재화을 탐하는 것 또한 자신의 행동을 방해할 뿐이다(馳騁田獵令人心發狂, 難得之貨令人行妨)"고 했다.

눈과 귀와 코와 입을 잘 단속해 가면서 살아 나가라. 눈은 자칫하면 분수 밖의 물건에 현혹되고, 귀는 자칫하면 소리 밖의 좋은 소리를 놓칠 수 있으며, 코는 자칫하면 구린 냄새와 향기를 구분하기도 어려우며, 입 또한 달콤함에 빠져 다른 맛을 잃을 수 있다.

허나 일찍이 옛 선사께서는 "눈으로는 본 바 없이, 귀로는 들은 바 없이 분별과 시비를 다 놓아 버리고, 다만 마음 부처에 돌아가 스스로 의지하며 살라(目無所見無分別 耳不聽聲絶是非 分別是非都放下, 但看心佛自歸依)"라고 일렀던 것이다.

<문역연구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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