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대종사님은 왜 원불교를 만드셨을까요?

정전 고락에 대한 법문에서 사람 사람이 다 좋아하는 것과 사람 사람이 다 싫어하는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다 싫어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즐거운 낙이라 하셨습니다. 즐거운 낙을 다른 말로 하면 행복일 것입니다. 다 싫어하는 것은 괴로운 고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고자 합니다. 인류는 그동안 행복을 추구해 왔습니다. 보다 행복한 삶, 보다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우리 개인도 마찬 가지입니다. 누구나 알게 모르게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밥을 먹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배고프니까 먹죠. 배고프면 어떤가요? 행복하질 않죠. 이렇게 밥 먹는 것 같은 사소한 일도 실은 그 이면에는 "밥을 먹어야 행복하니까"라는 이유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평소에 생활하며 학교 가고, 돈 벌고, 친구 사귀고, 운동하고, 교당 다니고, 마음공부 하는 그 숨은 이유는 단 한 가지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대종사님께서 원불교를 만드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말은 뒤집어보면 "나는 왜 교당에 다니는가?"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럼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도 행복이라는 녀석 때문입니다. 정전의 표현 그대로 말씀드리자면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려 함이 원불교를 만드신 이유"라고 하셨습니다.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이란 괴롭게 살아가는 생명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나도 포함되죠? 괴롭고 힘든 나를 행복한 곳, 낙원으로 가게 하기 위해서 원불교를 만드셨고, 내가 교당에 다니는 것입니다.

열반하신 법정스님이 근래에 읽었던 책 중에 〈꾸뻬씨의 행복여행〉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어떤 내용인가 하면, 프랑스 파리에서 땅이 가장 비싼 곳에 상점들이 즐비하게 있습니다. 그런 중심가에는 보통 어떤 상점들이 들어설까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느 날인가 부터 그 중심가에 한 개 두 개 숫자가 늘어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화관도 아니고, 음식점도 아니고, 옷가게도 아니었습니다.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신경정신과 병원이었습니다.

프랑스라는 나라가 부유해지면 부유해질수록 묘하게도 정신병원의 숫자는 계속 불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은 그 병원들 중에서도 손님들이 가장 많이 찾는 아주 유명한 병원이었습니다. 환자들은 꾸뻬씨를 찾아와서 "이래서 괴롭고 저래서 괴롭고 정말 죽겠습니다"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꾸뻬씨는 갈수록 괴로운 사람들을 돌보느라 바빠졌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묘한 아이러니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괴로움을 보살펴주는 꾸뻬씨 자신도 역시 행복하지 못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행복을 찾아서 여행을 떠납니다.

여러분 대종사님은 몇 살 때 깨달으셨죠? 26세셨습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을 얻으신 청년 대종사님의 눈에 비친 인류의 미래는 과연 어땠을까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이것이 대종사님의 미래상입니다.

대종사님은 마음난리로 괴로워 할 후천시대의 사람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원불교를 만드셨습니다. 우리 교법이 바로 그런 법입니다.

누구나 괴로운 고는 싫어하고
즐거운 낙은 좋아한다

즐거움은 곧 행복이요
그 행복은

정신적 삶을 추구하여
물질의 노예에서 벗어나야


우리 원불교인들에게 주어진 두 가지의 사명이 있습니다. 무엇 무엇일까요? 첫째는 나 자신이 행복해질 사명이 있습니다.

대종사님은 개교의 동기에서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려 함이 그 동기니라"고 하셨습니다. 괴로운 지옥 생활하는 사람을 행복한 낙원으로 이끌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종사님의 사명입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보면 원불교를 믿는 우리도 지옥생활 하는 사람을 행복한 낙원생활 하게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행복하게 해야 할 사람 중에 0순위는 누구입니까? 그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행복해야 남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지요. 내가 마음공부를 해야 남도 마음공부 시킬 수가 있지요. 그러니 우리에겐 내가 행복해져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다음 두 번째 사명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야 할 사명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떻습니까? 이런 일 저런 일이 다 있습니다.

좋은 일도 있지만 괴로운 일도 있지요. 내가 괴로운 일을 당했을 때 마음공부로 행복을 찾는 경험을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자기가 체험을 한 사람은 남도 체험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체험하면 내 아버지 어머니를 행복하게 하고, 형제를 행복하게 하고, 친구 그리고 사랑하는 이성을 행복하게 하고, 만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사회는 아직 물질적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게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에요. 사실이 그렇습니다. 나는 20평에 사는 데 친구는 100평 산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나보다 100평에서 사는 사람을 더 알아줍니다. 나는 연봉 이천인데 친구는 2억이면 당연히 사람들이 2억 버는 사람을 더 대우해줍니다. 그러니 죽기 살기로 일하고, 돈돈돈 하고, 또 부모들은 죽기 살기로 공부해라 공부해라 말하고 그러죠. 당장 눈에 보이는데 보통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안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사는 게 바쁘고, 팍팍하고, 재미가 없지요.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에서 우리 인생이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요? 대종사님은 영육쌍전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소유도 존재도 다 챙겨야 하지요. 그런데 요즘 세상은 어떻습니까? 소유만 물질만 챙깁니다.아이들 교육도 학교공부만 시키지 인생 공부는 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금 세상이 이렇게 난리입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소유와 존재, 물질과 정신 이 두 축을 잘 조율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대종사님은 분명하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영육쌍전이지만 정신이 중심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소유와 존재, 물질과 정신, 세상과 교당, 세상살이와 수도생활은 행복을 싣는 수레의 두 바퀴입니다. 세상은 물질만 쫓으며 괴로움에 행복에너지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신과 물질, 세상살이와 수도생활에 다 투자하여 나 자신이 행복해지고, 내 가정과 이웃을 행복하게 만드는 낙원세계 건설의 주인공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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