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묵대사 출가한 서방산.

봉곡 김동준은 봉서사 근방의 사람으로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다. 봉곡은 유학자이고 진묵은 승려지만 서로 사귀어 격의가 없었다.

어느 날 진묵이 봉곡의 집에 가서 무엇을 찾아볼 대목이 있었는지 〈주자 강목(朱子綱目)〉 70권을 빌려 동자에게 짊어지게 하여 절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봉서사까지 30리 거리인데 길을 가면서 진묵은 강목 한 책씩 뽑아 보기 시작하여 절에 도착하기도 전에 70권을 다 보았다.

길을 떠난 지 얼마 아니되어 동자가 책을 도로 짊어지고 돌아오자 봉곡이 괴이쩍게 여겨 물었다.

"어찌하여 책을 도로 짊어지고 오느냐?"
"가는 도중에 대사께서 다 보았답니다."
뒤에 봉곡이 진묵을 만나자 따졌다.

"귀한 서책을 빌려가서는 보고 땅바닥에 버리다니 어찌 그럴 수 있소?"
"허허, 물고기를 잡고나면 통발은 필요 없지 않소?"
진묵의 대답에 봉곡은 대꾸하지 못하였다.

봉곡이 진묵을 공양하기 위해 여종을 보내어 맞아오게 하였다. 여종이 중도에서 허공을 바라보고 선 대사를 만났다.

"스님, 저희 어른께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대사는 그 말에 대꾸는 않고 엉뚱한 소리를 하였다.

"네가 아들을 갖고 싶으냐?"
"예에?"
해괴한 소리라 여인은 말뜻을 알지 못하였다.

"쯧쯧, 네가 어찌 그리 복이 없냐. 돌아가서 내가 곧 간다고 전해라."
진묵이 오자 봉곡이 어찌 그리 늦었냐고 그 연유를 물었다.

"내가 재를 넘어오다 보니 마침 한 줄기 영기가 서쪽 끝에서 떠올랐소. 그런 일은 만나기 어려운 일이기로 끌어당겨 사람에게 주입시키려 하였으나 마땅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소. 그 기운이 흩어져 상서롭지 못한 데로 흘러갈까 걱정되어 멀리 허공 밖으로 물리치느라 늦었던 게요."

진묵이 봉서사에서 20리 거리인 익산 땅 춘포 쌍정리 선돌말의 누나 집을 찾았다.
누나는 일꾼들과 가을갈이를 하고 있었다. 밭두렁에 앉아 남매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동안의 궁금한 사연들을 나누었다.

"참, 대사가 곡차를 즐겨 하제? 시장할 터니 한잔 대접해야겠네. 함께 집으로 가세"
"누님, 밭갈이도 바쁜데 내게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이나 계속 하구려"
누나는 오랜만에 만난 동생을 밭머리에서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그럼 곡차를 어디 두셨는지 알려주구려. 돌아가는 길에 한 모금 축이고 가리다"
"원, 대사 고집두. 부뚜막에 호리병을 두었으니 갈증을 풀고 가소."
진묵은 누나 집 부엌에 들어가 곡차 한 병을 다 기울인 뒤 서방산을 향하여 떠났다.

해가 진 뒤, 집으로 돌아온 누나는 부뚜막의 호리병을 치우다가 그대로 가득 술이 들어 있어, 이상한 예감이 들어 옆에 놓인 간수 병을 들어보았다. 웬걸 가득 차 있어야 할 간수 병이 말끔히 비어 있었다.

누나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독한 간수를 마셨으니 가다가 어느 산기슭에 배를 움켜쥐고 뒹굴다 변을 당하였으리란 생각이 들자 눈앞이 캄캄하였다.

누나는 동이 트자마자 봉서사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대사가 건재해 있음을 확인하고, 세상에 별 희한한 일도 다 있다며, 동생의 도력에 비로소 감탄 감탄하였다.

▲ 진묵전의 벽화.


진묵이 산길을 가다가 인적이 드문 외딴집을 만났다. 중년과부 모자가 살았는데, 마침 외아들이 먼 장거리에 구경을 가고 없었다.

과부가 장독대 울바자 너머로 지나가는 행각승을 보고 불시에 색정이 동하여 유혹하였다. 진묵이 그녀의 뜻에 응하던 도중에 마당에 툭 꼭지 빠진 감(반시)이 떨어졌다. 옷고름을 풀다 말고 진묵은 슬그머니 일어나 반시를 주워 성큼 한입 베어 물었다. 시방 대사는 배가 더 출출했던 것이다.

이후, 이 고장에서는 섣부른 정사 장면을 두고 이야기할 땐 언필칭 벌레먹어 꼭지 빠진 설익은 감에 빗대어 말하였다. "반시 되어 떨어지면 김새뿌리는디, 잘 익은 홍시가 돼야 끝내주는디" 하고 시시덕거리곤 하였다.

진묵의 그릇은 그가 지은 다음 한 수의 시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어느 때인가 곡차를 동이채 마시고 읊었다는 게송이 전한다.

天衾地席山爲枕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요 삼아 산을 베고 누우니
月燭雲屛海作樽 달은 촛불, 구름은 병풍, 바다는 술동이네
大醉居然仍起舞 크게 취해 거연히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매
却嫌長袖掛崑崙 곤륜산이 소매자락에 걸릴까 걱정이네

석두거사는 진묵의 그릇 됨을 '천지를 유희장삼고 유유자재하게 놀고 간 불보살'이라 하였다.

진묵이 일흔둘이 되던 가을 어느 날(1633년: 인조11), 목욕을 하고 삭도를 친 뒤 밖에 나가 시자와 함께 흐르는 시냇물 줄기를 따라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잔잔한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더니 물었다.

"저것이 부처님의 그림자가 아니냐?"
"그건 스님의 그림잔데요."

"너는 고작 내 그림자만 알고 진면목은 모르는구나."
하고 진묵은 돌아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바로 가부좌를 하고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내 장차 갈 터이니 물을 것이 있으면 물어라."
"스님 백세 후 종승(宗僧)을 뉘에게 댈까요?"
"무슨 종통이 있으리요."

그러나 법통은 누구에게든 대야 하므로 제자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였다. 제자들이 거듭 가르쳐 주기를 청하자 마지못해 대답하였다.

"명리승이지만 휴정 노장에게 붙여 두어라."

그러더니 거연히 입적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열반한 봉황이 깃드는 절이 자리잡은 서방산(西方山) 이름을 진묵이 지었다 한다. 스스로 여래라 자처하며 서방 정토에 왕생할 것을 예시하였다는 것이다.

서산 휴정(西山休靜)은 진묵보다 마흔두 살이나 연장이었다. 진묵 일옥(震默一玉)은 그에게 법맥으로든 사상적으로든 영향받은 바가 전연 없지만 당시 인심을 따라 부득이 그에게 연을 대었다. 서산이 임진왜란 그 광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창 선풍을 떨칠 때 진묵은 스스로 일컬은 법호처럼 뇌성벽력 뒤의 정적 그대로 한세상을 유감없이 즐겁게 놀다 갔다.

▲ 진묵은 〈주자강목〉 70권을 빌려가다가 도중에 다 읽고 책을 버리고 "물고기를 잡고나면 통발은 필요없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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