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챙겨주고 이끌어준 스승

▲ 이경봉 교무/상주선원
원기49년 여름,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계룡산 신도안에서 대산종사를 처음 뵈었다. 그해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열반하시고 나는 병으로 잠시 학교를 쉬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지금은 고인이 된 통타원 박지원 교무(이모)가 부모님을 통해 나에게 대산종사가 계시는 신도안으로 가볼 것을 권유했다. 그리하여 나는 학교를 쉬는 동안 신도안에서 생활하게 됐다.

그때 신도안의 대중들은 날마다 공부와 작업을 병행하며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여름 방학이라 전국에서 교무는 물론 교학대학 예비교무와 교도들이 신도안에 많이 들어왔다. 대중들은 물 맑은 동용추, 서용추 계곡에서 물놀이도 하고 간식도 먹으며 대산종사의 법문 듣는 재미로 즐겁게 생활했다.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행복해 보였다. 나도 가끔 대중들과 함께 법문을 들었다. 대산종사와 함께 계곡에서 목욕을 할 수 있는 영광도 누렸다. 그때 나는 우연히 대산종사의 몸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대산종사의 아랫배가 표주박 엎어놓은 것 같이 볼록 나와 있었던 것이다. 무슨 배가 저렇게 생겼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단전주선을 많이 한 단전배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키도 작았지만 허리도 좀 굽어있었다. 하루는 대산종사께서 나를 유심히 살피더니 "경봉이 허리를 펴라"고 하시며 "허리가 굽어있으면 '나는 죽었다'하고, 허리를 쭉 펴면 '나는 살았다'라고 해라"고 당부하셨다. 그 뒤로 나는 지금까지도 그 말씀을 받들고 있다. 또 한 번은 내가 걸어가는 모습을 보시고는 일자 걸음으로 신발이 똑같이 달아지게 걸음을 걸으라고 하시며 나의 자세를 교정해 주셨다.

원기50년 신정절을 맞아 전국에서 재가 출가 교도들이 많이 왔다. 특히 중앙총부의 교무들이 많이 왔었다. 그때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 큰 고모도 대산종사께 인사도 드리고 아픈 나를 보러 신도안에 오셨다. 대산종사께서는 설법시간에 대중 속에 앉아 계신 우리 어머니를 향하여 "경봉이 어머니 어디계시냐?"며 "일어나 보라"고 하셨다. 우리 어머니는 영문도 모르고 하명을 받고 저 뒤에서 일어나셨다. 대산종사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경봉이 전무출신 시킬 수 없느냐"고 물으셨다. 어머니께서는 당황 하시다가 "아들이 한다면 시켜야지요"고 말씀하셨다. 대산종사께서는 바로 옆에 앉아있는 나에게 "너, 어쩔래?"하고 물으셨다. 나는 장남이라 못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나도 장남이다"라고 웃으시며 신년 법문을 하셨다. 당시 나는 아버지도 안계시고 오대조(五代祖) 부터 종가집 장손이라 집안을 이끌어 갈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생각으로 전무출신을 하라는 말씀을 거역했었다. 7개월 정도 신도안 생활을 마치고 다시 고등학교 1학년에 복학해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방학만 되면 신도안에 계신 동산 이병은 삼동원 원장한테서 편지가 왔다. 대산종사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다녀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매년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 되면 대산종사가 계신 신도안에서 여러 대중과 함께 즐겁게 법문도 받들고 대중과 어울려 지내다가 오곤 했다.

나는 원불교가 좋아서 동생들을 전무출신 시키고 싶어 교당에 하숙도 시켜보고 총부에도 보내 보았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전무출신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바로 남동생에게 뜻을 밝히고 대산종사가 계시는 중앙총부로 왔다.

그때 대산종사께서 "네가 올 줄 알았다"는 말씀과 함께 "잘 생각 했다"라고 하시며 기쁘게 맞아주시어 내 나이 25세에 출가를 하게 됐다. 끝까지 챙겨주시고 이끌어 주신 스승님의 은혜 보은하며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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