뵙기만해도 업장 녹아

▲ 최정안 교무/만덕산훈련원
영산에서 공부하던 시절, 대각지에서 기도하고 오는 길이었다. 검정색 승용차가 오고 있기에 누구인지 모르나 돌아서서 합장하고 인사하자 승용차 유리문이 열렸고, 대산종사께서 웃으시며 "네가 예수교 다니다 온 학생이냐" 하고 나를 기억해주신 그 한 말씀에 감동이 되어 신을 바치며 내 인생의 큰 스승으로 모시고 살아 왔다.

사비생이라서 정해진 곳이 없어 방학 때마다 신도안에서 살았고, 동용추와 서용추 혹은 법당에서 대중들과 함께 대산종사를 모시고 법문 받드는 즐거움과 환희심으로 모든 시간이 멈춰있었다. 그 무렵 받든 많은 법문들은 가뭄에 단비 내리듯 나의 공부 길을 열어주었고 나를 바르게 키워준 은혜의 시간들이었다.

영산 수학시절에 조실 시자를 하며 가까이 모시면서 부처와 중생의 다른 점은 정성이 한결같은가? 아닌가? 의 차이임을 알 수 있었다. 동산수학시절에도 조실 시자를 하며 새벽 심고 모시러 나오시는 발이 따뜻하기를 바라며 털신을 연탄불에 데워서 드렸던 행복한 기억도 있다.

훈련교무시절 한달간 교화실습을 종법실에서 했다. 어느 날 원평교당에서 계실 때 대산종사께 진지를 올리고 밥솥의 누룽지를 끓이기 위해 불에 올려놓고 밥을 먹다가 그만 잊어버렸다. 늦게 생각나서 가보니 대산종사께서 끓어 넘치고 있는 밥솥을 내려놓으신 것이었다. 마음을 챙기고 살지 못하는 부끄러운 내 모습을 들킨 것 같아 차마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는 나에게 아무말씀도 안하셨지만 오래오래 죄송했다. 그 일은 나와 대산종사님과 비밀이 되어버렸다.

처음 발령지는 서울 한남동 수도원에서 구타원 종사를 모시고 살았는데 어느 날 구타원 종사께서 모아놓은 시봉금 1억원을 찾아서 성업봉찬성금으로 조실에 올릴 때 기뻐하시던 모습도 기억이 생생하다.

삼동원 근무시절 대산종사께서 3개월 씩 주재 하실 때 전국각지에서 오는 교도들과 법문 받들며 삽삼조사 게송을 배웠던 기억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신촌교당에서 4년 근무하고 있는데 만타원 김명환, 수산 이철원 대호법 부부가 희사하여 하와이훈련원이 신설되자 조실에서 "하와이 국제 훈련원교무로 가라고"하셨다 꿈에서도 미국교화는 생각해보지 못했기에 안 간다고 했고, 미국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다른 교무 보내시라고 했다가 꾸중을 듣고 결국 하와이교무로 8년을 근무하게 됐다.

훈련원을 법당과 식당, 조실 방을 새로 증축하고 대산종사를 모시기로 했다. 건강이 매우 나쁘시어 하와이 가시는 것이 무리라는 주치의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휠체어 타고 호놀룰루 국제공항에 오셨을 때는 꿈이 아닌가 생각하며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이때 성자의 초인적인 염원은 하늘도 감동케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산종사께서 3개월간 하와이에 머무시며, 하와이 원주민 천도재, 아시아 태평양전쟁으로 희생당한 영가들의 천도재, 진주만 폭격으로 희생당한 영가들의 천도재를 지냈다. 또한 기원문결어 법문을 발표하셨고, 150여 명의 대중과 함께 하와이 국제 훈련원 봉불식을 거행한 일은 평생 잊을 수 없는 홍복이라 생각한다.

지금도 하와이에서 고 시타원 홍인덕종사가 사드린 멋진 선그라스를 끼고 자동차로 산책 나가실 때마다 손을 흔드시며 미소 지으시던 그 모습은 아직도 내 가슴에 살아있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리웁고 보고 싶은 스승님! 가까이 뵙기만 해도 업장이 녹아버리고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살려내시고 살려 쓰시는 부처님! "현대인들의 머리는 너무 크고 손발이 작아 기형의 형상이라" 하시며 "아는 것은 많아 머리가 큰 것이요, 실천력이 부족하여 손과 발이 작다"고 하신 법문을 늘 마음에 새겨 받들고 실행 할 것을 다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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