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여중·고 기반 확립

주세불이 새 회상을 열고 전신전수(全信全受) 전탈전여(全奪全與)할 법연을 찾을 때 혈심으로 호법봉도한 그 사람. 이소성대의 정신으로 원여중·고의 기반을 확고히 한 천산 이건춘(天山 李建春, 1920~1989) 대봉도.

그는 농촌의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이건양씨의 연원으로 입교를 하고 14세 되던 해에 영산선원에 입선했다. 2년간 수학을 마친 후 서무부 서기로 근무를 시작했다. 이 때 시대를 향도해갈 교육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당시 배재고에 재학 중인 숭산 박광전종사에게 교과서와 참고서등을 부탁해 탐독했다. 이런 열망으로 인해 서울로 상경해 한영학원과 영장중학교에서 4년을 공부한 후 총부로 돌아왔다.

해방이 되자 교단에서는 이리·서울·부산등지에서 전재동포 구호 사업을 펼쳤다. 그는 묵산 박창기 대봉도를 도와 서울로 올라가 적극 협력하다 기회가 되어 동국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학교를 마치고 잠시 부산으로 내려가 있는 사이에 군 총동원령으로 연행되어 북으로 진격중에 포로가 되어 32개월여를 노역 등을 하며 고초를 겪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그의 집안도 한국전쟁의 피해를 비껴갈 수 없었다. 장모와 처, 딸 등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이런 집안을 추스리다 상산 박장식 종사를 도와 원광중·고의 국어교사가 됐다. 그러나 서무과장이 갑자기 연고가 생겨 그 자리를 맡게 됐다.

이 즈음 정산종사는 여성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기관 창립을 하명했다. 정산종사의 뜻을 받들어 헌타원 정성숙 대봉도와 함께 10여명의 여학생들을 모집해 이리보육원 창고 방에서 원광대부속실업여자학교로 출발을 했다. 학교 창설 시기가 한국전쟁 직후인지라 교단도 가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러한 때에 정산종사의 부촉을 생명과 재산으로 알고 이소성대로 하나 하나 이뤄나갔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불어나는 학생들로 인해 원광중학교의 교사 일부를 빌려 쓰기 위해 시내로 진출했다. 교사 신축과 정규학교로의 인가는 해가 갈수록 숙제 중 숙제였다. 이런 난제를 풀기위해 여학교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일을 추진했다. 중앙대분교 인수로 정규학교로의 모습을 갖추고 발전을 했다.

이후 교육환경이 좋은 배산 기슭에 새로운 교사를 신축하여 호남 굴지의 명문 사학으로 도약했다.

그는 교육사업에 전력하면서도 반백년기념 사업과 해외교화 지원, 서울회관 건립에 협력하며 호법공덕을 두루 미쳤다. 이와 함께 교육사업에 전력투구한 30여년은 원불교 교육사업의 한 획을 그었다. 대산종사는 그의 영전에 "이 일을 이뤄 낸 일은 티끌 모아 태산이요, 무에서 유를 창조한 일로 오늘의 원광여중·고는 천산 대봉도의 피와 땀의 결정체요, 삶이요, 마음이다"고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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