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제국 원무/광주전남교구 여수교당
나는 최세종 교무의 지도에 따라 원무를 지원하여 사령은 받았으나 많은 부분에서 부족했다. 신앙인으로서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대종사께서 〈대종경〉 전망품 11장에 "내가 먼저 행하는 것이 곧 남을 교화함이 된다"고 하셨음을 상기하면서 공·사 생활에 흠결을 줄이는데 노력했다. 그러면서 기도생활을 시작했다. 연말이면 참회 반성의 기도를, 새해에는 청운회원들과 함께 특별정진 100일기도를 퇴근 후 교당에서 올렸다. 처음에는 의식진행 등에 서툴렀으나 하고 또 하니 익숙해졌다. 철부지가 점점 사물에 눈을 떠가고 자신을 돌아볼 줄 알게 됐다. 내가 행하지 않고서는 남을 감동 시킬 수 없음을 늘 새기면서 신앙과 수행에 초점을 맞추어 실수를 줄이고자 노력했다.

원기91년부터 원기93년까지 3년은 내 공직생활 중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로 기억된다. 세계박람회 유치를 위해 시민들이 한 마음 되어 시민운동을 전개하고 큰 행사도 많이 치러야 했다. 특히 당시 근무했던 부서는 내 역할이 중요했던 부서라 타인의 이목이 쏠렸다. 자연히 나의 행동과 업무처리 행태는 관심의 대상이 됐고 '원불교인의 창'이 되겠다던 서원을 반조해 볼 때 더욱 조심스러웠다. '정의는 용맹 있게 취하고, 불의는 용맹 있게 버리는 실행의 힘'이 필요했다.

우선 법회출석의 장애가 됐던 직장내 마라톤 동호회 달사모 회장을 그만두었다. 법회 무결석이 목표였다. 그리고 일과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집에 불단을 조성한 후 기도문을 작성하여 기도 생활을 실천했다. 뭔가 잘 안 풀리고 해결하기 힘든 일이 있을 때는 교전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 기도생활과 교전봉독 그리고 100배, 200배, 천배의 절 수행도 해보면서 나를 돌려 세웠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할지라도 화 내지 말기를 다짐했다.

교당생활도 마찬가지다. 교구내 유일한 원무로서 부끄럽지 않도록 해야 함도 의무감이었다. 직장, 교당, 가정 그리고 사회생활 모든 부분에서 절제된 노력이 요구됐다. 내가 어렵고 힘든 3년을 잘 보내고 그 큰 행사들을 비교적 무난히 치러낼 수 있었던 힘 그것은 신앙에 기초한 가르침에 충실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교무님께서는 '변화되는 내 모습을 보는 재미'를 말씀해 주셨다. 또 원기92년부터 매월 원광을 10권 씩 지원해 주며 직장교화의 물꼬를 틀 수 있도록 도와 주셨다. 매월 초 관심대상 동료들에게 원광을 1권씩 보내면서 법문과 내 마음이 담긴 소중한 편지도 함께 넣어 전달함으로써 교화의 창을 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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